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우주의 원초적인 기원에 대해서 오늘 날 수준의 과학적인 지식을 전달하려고 기록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서 세세한 과학적인 데이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소위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창세기를 통해서 천문학이나 지질학의 연대를 산출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이기 때문에 과학적 진실과 상충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지식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신 책은 아니기 때문에 성경을 가지고 과학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넌센스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건전하고 균형잡힌 신앙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책은 철저히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시키고 온 우주를 그 주님의 통치 아래 통일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인류에게 선포하시기 위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사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드러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39절을 통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장도 이 세상 만물의 소유자 되시는 우리 주님을 선포하기 위한 장엄한 기초로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던 극도의 보수적 성향의 신앙인들이 이 책에서 인류의 모든 연대를 산출해내려는 헛된 시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의 계보와 그들의 나이를 단순 계산해서 지구의 연대를 추정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대주의자들이라고 하는데요, 이 사람들은 창조에서부터 노아홍수 때까지를 2천년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노아홍수에서 아브라함을 거쳐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는 구약의 역사 전체를 또 2천년으로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를 2천년으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성경을 근거로 추산하는 지구의 나이는 불과 6천년 정도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건전한 성경학자들은 성경이 그렇게 연대적으로 정확한 데이타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어떤 족보에는 아무개의 아들 누구라고 써있는데 그 사이에 3대나 4대에 걸친 인물들이 생략되어 있기도 합니다. 구원을 설명하는 역사에 필요치 않은 인물들은 과감히 누락시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아들이라는 단어가 포괄적으로 후손이라는 개념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몇 대를 건너 뛴 후손에게도 ‘아무개가 아무개를 낳았다’ 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의 대표적 지성이라고 불리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를 비롯해서 많은 훌륭한 성경학자들이 아브라함의 역사 이전에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하는 6천년 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를 수백 만년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체적으로 성경학자들이 인정하는 인류의 역사는 대략 2만년-3만년 정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학문을 신학의 시녀로 만들면서 군림하려고 하는 고압적인 주장을 삼가해야 합니다. 모든 학문은 다 그 자체로 깊이 파고들면 그 끝지점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도록 되어 있는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선물인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안내해 주는 영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뛰어날 뿐이지 모든 학문의 분야를 다 간섭하고 지도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의 기록을 전적으로 허구에서 만들어진 신화나 전설로 치부하고 창세기의 이야기는 그 전달하려는 주제가 중요한 것이지 역사적인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자기들 딴에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에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나 수많은 기적들과 같은 일들의 역사성은 다 부정합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그 모든 이야기들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교훈만 알아들으면 그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훌륭하다고 존경해 마지않는 슈바이처 박사 같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박애정신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다가 기득권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안타깝게 죽은 아까운 청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고상한 사랑의 정신을 본받아 사는 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가진 안락한 삶을 버리고 의학을 공부해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원주민들을 돌보았습니다. 1952년에 세상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었지만 그는 하나님께는 기독교 신앙의 큰 대적자일 뿐이었습니다. 성경 기록의 사실성과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를 한낱 윤리적인 이론으로 전락시키려는 마귀의 술책입니다. 우리는 가장 고상한 외투를 입고 광명한 천사처럼 다가오는 이러한 이론들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역사적인 사실도 그 전하려는 핵심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신화적인 분위기로 전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진실과는 상관없이 전개된 허구의 신화가 아니고 반드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이 네 다섯살 꼬마들로부터 ‘엄마 아기는 어디서 생겨요’ 하고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프랑스나 유럽 쪽에서는 유치원생들 한테까지 성교육 교재를 가지고 남녀의 성기가 결합된 그림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한다고 합니다. ‘아빠 몸속에 있는 씨앗이 이 그림과 같은 방법으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난자를 만나면 아기가 되는 거야’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유머와 해학으로 그 질문을 처리해 왔습니다. 아이들이 그런 질문을 하면 우리의 어른들은 빙긋이 웃으면서 ‘애기는 다리 밑에서 주워온다’ 그럽니다. ‘어느 다리냐’고 물으면 ‘애기를 주워오는 그런 다리가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면 애들은 ‘그런가보다’ 하고 큽니다. 그런데 다 커서 결혼해가지고 자기가 성과 아기출산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나면 어른들이 미소를 지으며 했던 말이 왜 그랬는지를 알게 됩니다.
아기의 출생에 대해서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고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하고 말하는 것은 우화와 농담으로 처리했지만 결코 진실을 떠난 이야기는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의 이야기들도 그런 뉘앙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더니 살아 있는 영혼이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서 마치 미술가가 조각실에서 진흙을 이겨가지고 진흙 인형을 만들어 놓고 잘 말린 다음에 그 콧구멍에다가 후- 하고 바람을 불어 넣으셨다고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유아적인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창세기2:19)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모든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을 일일이 다 진흙으로 빚으셔서 ‘날아가라’ ‘움직여라’ 그러셨다면 그 작업이 보통 일이 아니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설화적인 기법으로 표현된 말씀을 읽으면서 그 세세한 방법과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흙으로 만들었다고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화체로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함부로 허구적인 신화라고 치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들은 성령께서 모세에게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진리의 핵심 주제를 잘 부각시키고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인 문제들은 알아서 유추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절묘한 문학형식인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못 알아들으면 자신들의 머리가 딸리는 것을 탓해야 되는데 사람들이란 그렇지를 않고 외려 성경을 어리석다고 탓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너 나 없이 다 좋아하는 시 중에 미당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 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를 읽고 ‘캬!’ 이러면 될 텐데 ‘야야야!!! 국화 꽃이 피는 것하고 소쩍새가 우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데? 아니 천둥치고 서리 내리는 게 국화꽃 피울라고 그랬단 말이야? 그런 바보같은 소리가 어딨어?’ 이렇게 말한다면 도대체 누가 바보입니까? 이 세상에는 헛 똑똑이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우리의 부족한 이해력으로 함부로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내용이 단순하면서도 얼마나 치밀한 논리가 있고 풍부한 은유와 웅대한 진리가 그 속에 들어 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자기 눈에 안 보이거든 겸손하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하옵소서!”
다시 성경 말씀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 때문에 진리 자체를 왜곡시키는 일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가장 곤란을 느끼는 것은 학교에서 배우는 지질학 연대에서는 수억년 또는 수십억년의 지구의 나이를 말하는데 성경 창세기는 그 모든 과정이 단지 6일만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기독교 신학이 세대주의적인 근본주의였기 때문에 스물 네시간 씩의 6일간의 창조를 말하지 않고 그 하루 하루가 하나의 긴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마치 자유주의 신학이나 이단사설인 것인 양 공격을 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의 거봉 중에 한 사람인 헤르만 바빙크 박사 같은 분을 비롯해서 기라성같은 건전한 보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창세기 1장의 이 하루 하루를 24시간의 하루가 아닌 긴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첫째날 둘쨋날 할 때의 그 날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욤’이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스물 네 시간 하루를 뜻하기도 하지만 길고 긴 한 단위의 시대를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었다’고 하고 반복되는 말도 어떤 일에 한 단락이 마무리지어졌다는 히브리적인 관용어로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실제로 창세기에 여섯 번째 날에 창조되는 일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2:4-25)은 그 전체가 제 6일째의 창조 부분을 세부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4절로 6절에서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오랜 세월이 흘러간 느낌을 분명히 주는 말씁니다.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만에 일어나는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십니다. 그 다음에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그 사람을 거기에 두십니다. 그 다음에 19절에서 하나님이 또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 이끄시고, 아담은 각 생물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입니다. 이게 반나절이나 한나절에 끝날 일입니까? 그 다음에야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 하나를 꺼내서 여자를 만드십니다. 이 모든 일들을 단 24시간 하루만에 해치우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해석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가르치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무슨 신데렐라 이야기에 나오는 요정이 생쥐 한 마리와 호박 한덩어리를 가지고 ‘비비디 불라 바비디 불라 비비디 바비디 부 신기한 마술을 보여줄까 비비디 바비디 부’ 뾰로롱! 그러면 백마와 마차가 생기는 것처럼 성경도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을 안 읽어요. 목사가 설교하면 마음속으로는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 코고리 뭐’ 그러고 들어요. 신앙들이 아주 웃기는 수준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신 방법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인 우리들에게야 수십억년이 대단해 보이지만 시간 밖에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는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베드로가 말한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기독교 지성인들은 그런 내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한 사람의 소설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쓰는 소설속의 시간 바깥에서 여러분이 존재합니다. 소설 속 시간은 여러분 마음대로 조정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이런 구절을 쓰셨습니다. ‘그때 거실에서 요란하게 벨이 울렸습니다. 개똥이는 달려가서 막!’ 거기까지 쓰다가 급한 일이 생겨서 외출을 해야 됐습니다. 그러면 소설 속의 시간은 그 상태에서 멈추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외국 출장까지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겨가지고 한 달쯤 나갔다가 돌아와서 그 다음 구절을 씁니다. ‘수화기를 들자 여보세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전화벨 소리를 듣고 막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적인 일이 여러분에게는 한 달도 더 넘는 너무나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진행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던 TV 드라마가 끝나갈 때쯤 사람들이 괜히 다 착해지고 그러다가 어떤 장면이 지나가는데 갑자기 자막에 10년 후! 이렇게 뜨는 겁니다. 우리가 TV 밖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연속되는 순간인데 드라마 속에서는 10년도 100년도 단 한 순간에 지나가도록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하나님은 시간의 바깥에 계십니다. 이 사실을 참고하고 세상의 역사를 바라보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생각하신다면 훨씬 깊은 안목으로 믿음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일반 과학자들이 진화론이라고 하는 허망한 이론에 오염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진실들을 양심적으로 관찰하기만 하면 그들이 발견하는 우주와 지구의 상태가 창세기의 기록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우주와 만물이 만들어지는 그 정확하고 세세한 과정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런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진실을 잘 연구해서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솜씨들을 잘 볼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는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인류가 아담을 대표로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이룰 위대한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는데 그가 범죄함으로 인해 마음이 부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부패된 증상의 첫번째는 ‘자기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마귀처럼 하나님 대신에 자아를 숭배하는 자아 숭배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뿌리와 가지에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탐욕을 부리는 죄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이 타락한 상태를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 즉 구속의 언약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알아가야 할 가장 중요한 핵심 진리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창세기 1장을 읽으면 그 지혜로운 서술이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해서 저절로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모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들을 신이라고 떠받들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향해서 넙죽대고 절을 하는 우상숭배의 시대였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온 우주의 모든 것들,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모두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그분의 피조물들이라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세의 신학이 훗날의 시편 8편을 통해서 아름다운 노래로 고백되어집니다.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지가 똑똑한 줄 아는 자들은 이 진리를 못본다는 거예요. 오직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신뢰로 말씀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이 영광을 볼 수있다는 그 말입니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이 말은 어떤 사본에는 ‘하나님 다음 가는 존재로 만드시고’ 라고 기록되 있습니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8:1-9)”
조금 더 자세하게는 시편 104편에서 창세기 1장의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 여러분들이 창세기 1장을 여러 차례 읽으시면서 동시에 시편 104편을 함께 펼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를 깊이 묵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우리의 입술에서 찬송가 40장의 가사도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한 번 1절만 불러보실까요? 반주 없이 편안하게 불러봅시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는 주인이 계시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이 광막한 우주에 덩그라니 던져진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 기쁜 선언을 자신의 마음속에 선포하고 세상을 향해도 그 증거자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마음들은 결코 이러한 노래를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을 가리켜서 ‘던져진 존재’라, ‘피투의 존재라’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말로 적나라하게 표현한다면 ‘내팽개쳐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이 우주공간에 어떤 기준이나 이유도 없이 그야말로 우연히 내팽개쳐져 던짐을 받은 존재라고 본 것입니다. 성경의 안내를 받지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상을 본다면 이 말보다 더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날 보니까 이 세상에 내던져져 있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비록 그럴지라도 그 맹목적인 운명에 굴하지 말고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치면서 인간 스스로가 운명을 뛰어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말을 읽어보면 맹목적인 존재로 던져져서 죽음이라고 하는 부조리한 운명 앞에 속절없이 유린당하는 우리의 존재를 가지고 눈물겹게 투쟁하려는 그들의 정신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름답게만 느껴질 뿐 그곳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찾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허무를 이겨낼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릴 뿐입니다.
이런 실존주의 철학에 심취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을 통해서 운명에 굴하지 않는 용감한 인간상을 잘 표현했습니다. 고독한 바다 위에서 쪽배를 타고 낚시를 하던 노인은 자기의 고깃배보다도 훨씬 큰 청새치를 만나서 3일간의 사투 끝에 잡았습니다. 그런데 뱃전에 묶어서 돌아오다가 상어 떼의 공격을 받습니다. 또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항구로 돌아오지만 남은 것은 상어들이 다 뜯어먹은 앙상한 고기 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깊은 잠을 주무십니다. 그 내용 그대로가 운명에 항거하는 불굴의 인간상을 보여준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고전 중에 고전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미국인이지만 민주주의 남의 나라인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로버트 조던이라는 주인공이 작전상 중요한 교량을 폭파하는 임무를 짊어지고 파시스트 정부에 저항하는 게릴라 부대에 합류합니다. 그리고 그 게릴라 부대에서 정부군에게 부모를 살해당한 마리아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3일간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주인공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그만 중상을 입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이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동료들에게 부탁해서 울며 몸부림치는 여자를 말에 태워 떠나 보내고 적들이 오는 길목에 총을 겨누면서 비장하게 기다립니다. 그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운명에 굴하지 않는 용감한 인간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소설에 감동을 받습니다. 하지만 정작 헤밍웨이 자신은 그토록 많은 인기를 누리고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의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하나님 없이 용감해져 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아름다워 보일 순 있어도 그 허세에 대한 보상은 끝없는 절망과 허무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사랑을 확신하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온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삼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시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님을 보내셔서 지면을 새롭게 하시며 내 몸에 심장이 뛰고 피가 돌며 신선한 공기로 호흡하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사상에 하나님을 떠올리게 해주시고 매일 거룩하게 빚어 가시다가 마침내 영원한 존재로 들어 올리신다는 것이 그분의 위대한 계획이십니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그분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고 경이로운 마음으로 찬양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의 가슴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그 위대하신 솜씨를 찬양하는 노래가 지금부터 영원까지 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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