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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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1-2 --- 네 창조자를 기억하라
진주호 2015-01-02 추천 0 댓글 0 조회 261

우리는 지난 주일에 창조 이전부터 영원히 존재하고 계셨던 삼위일체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표준이시고, 푯대이심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의 연장선에서 그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통해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고 선언을 하시는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주의 천지 만물에게다 대고 선포한 말씀이 아닙니다. 천사들 들으라고 선포한 말씀도 아닙니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생물들과 짐승들에게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으로 남기신 이유는 오직 모든 시대의 인간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선포하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듣고 흘려버리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그 선포 앞에서 올바르게 반응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선포된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듣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듣고 그분을 경외하라는 말씀이며 또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마다 믿음의 인물들을 찾고 만나십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마음에 들어하시던 인물을 꼽으라면 다윗을 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평가하시기를 '내 마음에 합한자'라고 하실 정도로 맘에 들어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그 주권적인 선언 앞에 엎드려 마땅한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지만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 흡족해 하시던 인간의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주인을 알아보는 피조물의 반응>

 

주인이 누군지를 알아보는 지혜는 짐승들이 가장 확실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지으실 때에 인간들에게 철저히 복종하도록 본능을 새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짐승들의 복종을 받아보면서 단순히 인간들이 기분 좋아하고 끝나라는 것이 아니고 짐승들에게서 그런 복종과 충성을 받아봄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어떤 충성심을 보여드려야 하는지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충성심에 대해서라면 동물들 중에서도 단연코 개들이 최고입니다. 개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겅중겅중 뛰고 꼬리를 흔들고 거의 까무러칠듯이 좋아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한결같아서 배반하는 법이 없습니다. 저는 그런 강아지들의 반응을 보면서 늘 다윗을 떠올리곤 합니다. 다윗이 일평생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바로 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동일 때에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쁨을 다하여 반응할 줄 알던 사람입니다. 참으로 그는 창세기 1장 1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할 줄 알던 사람입니다. 그가 표현한 충성스러운 기쁨의 절정은 오벳에돔에 방치되어 있던 하나님의 궤를 자기의 성으로 영접해 들일 때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열정적으로 춤을 추다가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그 하나님께서 양치던 자기를 불러 주시고 사울의 칼날을 피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주신 일과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고 구원의 복으로 채워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과 감격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이 되어 가지고 체면깎일 모습을 보였다면서 비아냥거리는 미갈 공주에게 다윗이 대답한 말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아주 잘 보여 주었습니다.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무엘하6:20-22)"

 

무릇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기의 그 행동을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뜻입니다. 미갈 당신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내 감격과 내 감사를 알 수 없는 거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어떤 감동을 받아서 만들어낸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나의 왕 앞에서 노래하며 춤을 춰/ 아무것도 내 열정 막을 수 없으리/ 나는 야 다윗처럼 춤을 출거야/ 사람들이 비웃어도 나는 야/ 다윗처럼 춤을 출거야/ 나나나 나나나 헤이!/ 나나나 나나나 헤이!/ 나나나 나나나 헤이!/ 나나나 나나나 헤이!"

 

얼핏 들으면 그냥 락가수들 콘서트에서 가수는 노래하고 군중들은 열광하는 그런 노래같기만 합니다. 제 후배 목사님 한 분은 찬양을 잘 인도하시는 사람인데요 자기는 이 노래가 정말 싫다고 하더라구요. 왜 그러냐 그랬더니 아무 내용도 없이 그냥 사람들을 흥분시키기만 하는 것같아서 너무 세속적으로 들린다고 합니다. 곡조와 분위기만 보면 분명히 그런 면이 있습니다. 다윗이 왜 춤을 추었는지를 모르고 노래 자체만 신나게 부른다면 세상 가수들 콘서트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석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윗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이유를 알고 부른다면, 노래만큼 영광스러운 노래도 다시 없을 것같습니다. 여러분도 언제 기회가 있으면 하나님을 향한 터질듯한 열정을 표출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왕이 되어서도 춤추고 노래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향한 진솔한 감격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던 사람, 하나님은 매 시대마다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화가 나서 야단을 치면 거의 죽는 시늉을 합니다. 인간들은 부모나 높은 분의 책망을 들을 때에도 꼿꼿하게 눈에 힘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 설설 기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밸도 쓸개도 없다'고 욕할 정도로 인간이란 존재자체가 자존심과 고집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인 앞에서의 개들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덩치가 송아지만 개도 주인이 야단을 치면 꼬랑지를 내리고 절대 복종합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살살 기거나 발랑 누워서 항복을 표시하는 걸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다루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항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심각한 범죄를 지적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 곧바로 엎드려 통곡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책망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말하고 판단을 내리실 때에 공의로우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51:3-7)"

 

다윗이 제일 겁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여워 하시고 짐짓 물러가셔서 노여운 침묵을 나타내시면 다윗은 어쩔 줄 몰라하면서 애절하게 부르짖곤 했습니다.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편13:1-4)"

 

이렇게 하나님께 친밀한 교제를 갈망하고 나누면서 일평생을 지낼 때 다윗은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이 온 세상을 향해서 베풀려고 하시는 궁극적인 계획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부패된 죄악의 심성을 잘 아는 그로서는 장차 자기의 후손으로 지칭되시는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죄와 악을 멸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하나님의 계시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윗의 그 행복한 고백을 가지고 위대한 복음을 설명하였습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4:6-8)"

 

다윗이 일평생 하나님께 대하여 표현하던 감격의 노래와 춤은 단지 자신이 권력을 얻고 명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로 기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인되심과, 자격이 없는 인생들에게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바라보면서 그 영적인 소망으로 인한 반응을 내보인 것입니다. 다윗이 정녕 기뻐했던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음과 그 하나님이 죄악중에 멸망해갈 인간들에게 자기의 우편에 계신 주를 보내셔서 영원한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확고한 지식과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의 선언 앞에서 여러분과 저에게서도 다윗과 같은 이러한 경건한 반응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경외함이 없으면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

 

성경에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경외하는 반응이 없는 사람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고발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포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대해서 지극히 신실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그들은 마귀의 거짓말을 듣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쪽을 선택하고, 지극히 부패한 존재로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곧바로 지옥으로 던져 넣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제각각 태어나서 이 땅의 삶을 살도록 해 주십니다. 그 삶을 기회로 삼아서 잃어버렸던 생명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의 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서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인류를 길이 참아주시고 계십니다. 한 인생이 태어나서 일평생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호흡과 생명을 매순간 공급하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인생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고마움을 간직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제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오만과 불손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경악할만한 일입니다. 인생들은 마치 하나님께 대하여 더러운 신발을 신고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온 집안을 들쑤시며 유린하는 강도떼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존재를 입고, 하나님께서 주신 심장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공기로 호흡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배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 인간들인 것입니다.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14:1-3)"

 

아득히 먼 족속들만 이지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양육하신 이스라엘 백성들마저 자주자주 이런 패역함을 드러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생들의 모습에 충격을 받으시며 슬픔으로 가득 찬 울부짖음을 쏟아내시곤 했습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1:2-4)"

 

참으로 창세기 1장 1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지식에 합당한 경배를 하나님께 돌려드리지 않는 자는 나귀나 소만도 못한 무지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죄악의 잠에 빠져버리지 않도록 늘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표류하는 배>

 

또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자기 삶의 푯대로 삼지 못한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생의 목표라고 꺼내 놓는 것들은 영원한 방향을 가지기보다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필요할 뿐인 작은 욕망들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목표와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배는 아무리 크고 튼튼하고 다른 부분에는 아무런 고장이 나 있지 않아도 항해를 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망망대해 위에서 어디로 갈지에 대한 방향을 놓쳐버리고 모두들 배 안에서 각자의 욕망에만 분주하다면 그 배는 분명히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도 창세기 1장 1절이 선포하는 그 영광스러운 지식 앞에 겸손히 엎드려 경배하지 않고 저마다 자신들의 욕망으로 바쁘고 분주하다면 대책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 아무리 천하에 다시없는 부와 권세를 쥐었다고 해도 주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인생이란 바람에 불려가는 겨와 같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선언을 제대로 알아들어야만 우리가 갈 방향도 알게 됩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가 왜 존재하며 무엇을 해야할지를 안다는 것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은 없습니다.

 

지금의 러시아 말고 소련이라고 부르던 옛날 소비에트연방시절에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죄수들을 학대하는 방법 중에 아주 고약한 것이 전혀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땅을 파게 했다가 저녁에는 다시 메꾸게 하는 일이 있었답니다. 그런 일을 매일 반복해야 한다면 정말 죽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당신이 구덩이 하나를 팠다가 메꾸면 죽어가는 당신의 감방동료에게 주먹밥을 한 덩이씩 제공하겠다’고 한다면 그 일은 금방 의미로 충만한 기쁜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 배가 부른 것은 아니라도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자신이 사용된다고 하는 의미가 부여된다면 그 일은 허무한 일이 아닌 숭고한 봉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존재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을 이루는데 요긴하게 사용되도록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해줍니다. 내 인생이 영원한 가치와 의미와 방향과 목적을 가진 것이라고 말해주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참으로 위대하고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을 위해 얼마든지 사용하시라고 자신을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선포 앞에서 반응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적절히 사용되는 그것이 내게도 가장 행복한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명하시는 일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복되게 해주고자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명기10:12-13)”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며, 우리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심판과 연관된 창1:1>

 

네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과 연관하여 잊지 말아야 하는 마지막 한 가지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천지와 만물에 새겨져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주인되신 하나님께 마땅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1:18-20)"

 

강도가 들어와서 여러분의 집을 맘대로 사용하고 난장판을 만든다면 여러분은 몇 일이나 참아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만약에 대한민국의 모든 군대와 경찰병력을 다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을 혹시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다면 그래도 강도가 불쌍해서 오래 참아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힘이 없으신 분도 아닌데 우리 모두의 무례한 강도짓을 일평생 참고 계십니다. 오직 한 인생 한 인생의 삶을 보장하시면서 그들의 양심이나 이성의 통찰력이 혹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기회를 주고 계신 거라고 말씀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회를 따라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겠다고 진리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길을 찾아 떠났던 자들은 모두 '정답'을 발견하지 못하고 엉뚱한 이론들만 잔뜩 만들어 냈습니다. 그 마음들이 어두워져서 무지함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전반에 퍼져있는 조잡한 신화들, 추악하고 저급한 우상숭배들,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 등과 같은 철학자 등등이 길이 아닌 곳을 길이라고 가르쳐 수많은 사람들을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우리들은 진리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먼 길을 돌지 않고도 이 명확한 진리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가슴에 깊이 새겨 넣으시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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