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 하나님말씀 >
  • 창세기1장-3장
◈ 창1:26-28 ---- 인간이란 존재의 사용설명서
진주호 2015-01-26 추천 2 댓글 0 조회 803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우리는 여러 차례 같은 본문을 통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기사를 읽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존귀한 신분으로 만들어 주셨으며, 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창조된 자리에서 우리의 쓰임과 용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디에다가 어떻게 쓰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나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손에 넣었는데 그 물건을 어떻게 쓰는지를 모를 때 꼭 필요한 것이 사용설명서입니다. 사용설명서를 읽으면서 그 물건을 어떻게 쓰는 것이 제일 좋은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특히 28절은 흔히들 '문화명령'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용설명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 있는데 사용 설명서가 없으면 엉뚱하게 사용하는 예가 생깁니다. 제가 고등학생시절이었던 1980년대에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아프리카 칼라하리에 부시맨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문명과 단절된 채로 아프리카라는 자연 환경속에서 사냥도 하고 식물 채취도 하면서 아무런 소유 의식이 없이 평화로운 가족 공동체로 살고 있었습니다. 모두 같이 일하고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무척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락 위를 날아가던 생각 없는 경비행기 조종사가 마시고 남은 빈 콜라병 하나를 아래로 던집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난생 처음 보는 콜라병 하나를 가지고 이 순진한 부족은 난리가 납니다. 신이 내려 준 물건이라면서 아주 신기해합니다.

 

그런데 그 물건이 어디에 쓰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필요 없으니 다시 가져가시라고 신을 향해 공중으로 던져 올리다가 누군가 머리를 맞고 기절을 하는 재앙을 당합니다. 신이 도로 안 가져가시니까 할 수 없다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이리저리 굴리다가 차츰 그 병의 여러 가지 쓰임새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죽에 무늬를 찍기도 하고, 나무 열매를 깨거나 뿌리를 으깰 때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콜라병이 참 편리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쓰임새가 많아질수록 부시맨들 사이에서는 이 물건을 차지하려는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싸움이라고는 몰랐던 부시맨족의 평화가 한 순간에 깨어질 위기에 몰렸습니다. 더 있으면 곧 살인이라도 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회의가 소집되고 이 물건은 싸움과 불행을 가져오는 악마의 물건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부족의 평화를 위해 콜라 병을 땅 끝으로 가지고 가서 버리자는 결정을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쓰임새를 가진 콜라병 하나도 그 사용처를 모르는 부시맨들에게는 두렵고 곤혹스러운 물건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만약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밴츠 승용차를 새 걸로 하나 갖다 주었더니 부시맨들이 그걸 닭장으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웃기고 또 아깝겠습니까? 사용설명서도 없이 어떤 미지의 물건을 만나게 되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 치고 자기 자신이 어떤 목적을 가진 존재인지 그 사용설명서를 손에 쥐고 태어난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부시맨처럼 자기 스스로의 사용방법을 몰라서 당황하면서 평생을 삽니다. 그래도 태어났으니 어디에라도 쓰긴 써야겠는데...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용도를 찾아내려고 애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욕망대로 사는 삶>

 

제일 보편적인 것은 주어진 욕망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용설명서는 없는데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존의 본능은 있습니다. 그 본능적인 욕구들이 나름대로 사용설명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사는 일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 됩니다. 젊고 힘이 있을 때 먹고 싶은 것 많이 먹고 가보고 싶은 곳 다 가보고 하고 싶은 것 다해보자는 게 사람들의 가장 흔하게 자기 자신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노랫가락 차차차’라는 제목의 세상 노래가 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화란춘성 만화방창(花爛春城 萬化方暢))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이런 노래입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고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젊음은 잠깐 지나갈 뿐이다. 봄날의 성읍에는 꽃이 흐드러지고 만물이 제각각 피어나니 어찌 안 놀고 배기것냐?”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도무지 만족스럽지가 않다는 겁니다. 아무리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보아도 그 끝은 허탈하고 권태롭고 무기력해집니다. 그래서 보다 고상한 욕구들을 개발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내면의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 춤을 개발하여 추고 그럽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 허전하고 미흡합니다. 더 극대화된 예술적인 감각을 추구하는 어떤 예술인들은 심지어 마약에 빠지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근원적인 존재의 공허감을 완전하게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부정하는 삶>

 

반대로 욕망을 부정하고 삶에서 도피하는 것으로 방법을 삼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인간 존재의 이유와 목적은 모르고 고통 아래 짓눌려 있는 인류의 현실만은 제대로 관찰했습니다. 그는 삼라만상이 태어나고 욕망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삶을 끝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사는 건 고통이다' 라고 규정했습니다. 그 끝없는 고통의 반복이 불쌍하다고 생각했고 그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길이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면 해탈해서 부처가 되는 길 밖에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부처가 되면 인간도 신도 다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삶도 죽음도 다 초월하는 위대한 존재 부처가 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이 가르침이 제법 멋있게 들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는데 그 목적은 내던지고, 존재도 의식도 다 초월해서 하나님까지도 제껴버리고, 어딘지도 모르는 열반의 정토로 가겠다는 이 가르침은 절대로 올바른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은 석가모니하고는 조금 다르지만 어찌보면 사뭇 비슷한 느낌으로 세상을 두 가지의 세계로 분리해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체인 이데아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세계는 저급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영혼과 이데아가 진짜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먹고 싸고 욕망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모든 것은 영원한 실체의 그림자놀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육체라는 감옥을 벗어나야 비로소 그 영원한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는 기쁜 순간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이게 소크라테스의 이원론이고 그 수제자인 플라톤이 발전시킨 사상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면서 살았는데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론이라서 보수층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가 많은 젊은이들을 타락시켜서 신들을 믿지 않고 제멋대로인 사상을 주입시킨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리고 사약을 마시게 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받던 날 너무도 침착하게 '닭 한마리 빚진 게 있으니 대신해서 갚아달라' 그러고 나서 태연한 표정으로 독이 든 잔을 기울여 마셨다고 합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두려운 순간이 아니고 이데아의 세계로 넘어가는 행복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용감하게 죽을 수가 있었던 겁니다.

 

사람의 사상도 이렇게 철저하게 주입되면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건 죽음의 진면목을 몰라서 겁이 없는 겁니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강아지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글쎄요, 생각은 자유죠.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10:28)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고 경고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10:30-31)에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고 선포했습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것은 맞는데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판결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용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평생을 엉뚱한 이론으로 허비해버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초창기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너무 고상한 이론이라는 거죠. 그래서 기독교 사상을 플라톤 사상으로 재해석하려고 어리석은 시도를 해서 많은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점잖게 살다간 사람인데 뭐가 나쁘다는 거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원론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성경적인 신앙을 철학이라는 사상으로 오염을 시켜서 전혀 엉뚱한 모양으로 변질시켰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이후 중세로 접어들면서 철학을 추종하는 어리석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이데아와 영혼만을 중시하고 육체를 부정하는 플라톤의 사상에다가 스토아 철학의 금욕주의를 결합해서 현실을 부정하는 기독교를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중세의 기독교는 현실을 도외시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도를 닦는 수도원주의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속을 멀리하고 고요한 산속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보내는 그들을 지극히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경건은 절대로 현실의 땅을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혼만이 아니고 육체와 물질도 함께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가지고 비틀어진 우리의 현실이지만 온갖 죄악이 난무하고 싸움과 갈등이 존재하는 삶이지만 이 현실을 끌어안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토로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스토아 철학, 신플라톤 철학으로 이어지는 이 사람들의 잘못된 사상으로 기독교는 중세의 천년이라는 긴 시간을 어둠 속에 갇혀 사망의 잠을 자야만 했습니다.

 

플라톤의 이원론은 현실을 도피하는 이상주의만 자극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한 편으로는 이성과 영혼은 절대적으로 순결하고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적으로 행하는 모든 행동은 전혀 영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이상한 사상이 초대교회 당시부터 풍미했습니다. 이들이 교회에 해악을 끼친 내용은 '사악한 율법 폐기론'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해결했기 때문에 설령 우리가 육체로 죄를 짓고 산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절대로 다시 더럽히지 못한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 가르침으로 부녀자들을 꾀어내서 마치 신령한 가르침인양 주장하고 어리석은 여자들을 음행의 죄로 이끄는 거짓 선생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이비 집단 JMS의 정명석 같은 인간이 바로 이런 사상을 가진 부류일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기록한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이런 사람을 일컬어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정죄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사용설명서, 즉 성경을 참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생을 제멋대로 판단했고 많은 사람들을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도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철학자들은 모두 이 고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는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답을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설명을 듣고 온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그냥 어느 날 눈 떠 보니까 광활한 우주 속에 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해서 '인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존재일까?' 이걸 밝히려고 했습니다. 당연히 답이 안 나오죠...

 

니체라는 사람은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신을 들먹거리면서 너무도 오랜 세월을 인류가 신한테 억압당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신화나 전설에 얽매여서 살아서는 안 되겠다. 이제 신은 죽었다. 우리는 우리끼리 용기 있게 운명과 맞서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고 하면 필요한 건 초인의 의지다. 누군가 뛰어나고 위대한 영웅이 나와서, 초인이 나와서 인류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산주의 사상>

 

또 다른 사상도 있습니다.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고, 모든 정신 현상은 물질의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유물론입니다.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이 유물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에 살면서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이익을 남기면 그 모든 이익을 소수의 부자들이 독식하는 현상에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부도덕한 자본주의는 여러 단계를 거쳐 결국 자기 모순 때문에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일하고 평등하게 혜택을 받는 사회주의 시대가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오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계급투쟁을 해서 노동자 계층들이 총궐기하여 소수의 부르조아들, 즉 탐욕적인 부자들을 몰아내면 인류의 유토피아인 사회주의 시대가 더 빨리 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에 레닌이라는 사람이 또 나타나서 사회주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폭력도 정당하다고 하여 드디어 세계 곳곳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고 못살고 거덜나게 된 공산주의 국가들이 혁명이 일어난지 70년 만에 마침내 그 이념을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프랑스의 유력한 일간지인 르피가르지의 보고에 의하면 공산주의 혁명에 의하여 희생된 사람의 수가 약 1억 5000만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주장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 없는 사상을 펼치던 공산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것은 생지옥과 같은 죽음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포정치 뿐이었습니다.

 

<인간 사용설명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렇게 잘못된 생각들로 헤매지 않도록 창세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분명하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은 천지와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들을 질서정연하게 돌보면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여기서 '다스리며 정복하라'는 말은 내 욕심을 한껏 부풀려서 물질을 맘껏 누리고 소비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천지와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가꾸며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를 보존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와 만물은 그냥 아름답게 존재할 뿐입니다. 사물들은 제자리에 우뚝 서 있거나 생명으로 피어나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명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선포하고, 산은 그 도우심의 능력을 증거하고, 바다는 하나님의 권능의 다스리심을 나타냅니다. 크고 견고한 바위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연상시켜 주고, 산천초목들은 싹이 트고 줄기를 뻗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음으로써 매년 하나님의 신비로운 기적과 그 은혜로우심을 증명합니다. 짐승들은 자기들의 본능에 충실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지구를 생기로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시를 읊고 노래를 만들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존재는 인간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 중간생략 --- 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32)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33)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104:1-33)"

 

시편의 시가 아닌 일반적인 시라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시가 써진다면 저는 그런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습니다.

 

제비꽃에 대하여 - 안도현/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 제비꽃에 대해 알기 위해서/ 따로 책을 뒤적여 공부할 필요는 없지// 연인과 들길을 걸을 때 잊지 않는다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그래,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거야 자줏빛이지// 자줏빛을 톡 한번 건드려봐/ 흔들리지? 그건 관심이 있다는 뜻이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사랑이란 그런 거야// 봄은,/ 제비꽃을 모르는 사람을 기억하지 않지만//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단다// 그 사람 앞에는/ 제비꽃 한포기를 피워두고 가거든// 참 이상하지?/ 해마다 잊지 않고 피워두고 가거든//

 

한 떨기 꽃은 그냥 피어 있을 뿐이지만 그 꽃에서 사랑과 경이로움을 찾아내서 노래하고 찬미하는 건 인간의 몫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시인도 아닌데요...' 아니요 누구라도 다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진실한 시를 좋아하십니다. 여러분이 여행을 가시거나 가까운 근교 산에 올라가서라도 넓게 툭 트인 풍경을 바라보시면서 '아! 참 좋다!' 하고 느끼실 때, 거기서 그냥 끝내지 마시고 하나님께 한 말씀 꼭 여쭈시기를 바랍니다. 따라하십시다. '하나님! 참 좋습니다! 멋~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시를 매일 읊어 드리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노래하는 자들>

 

이 세상이 죄로 인해서 망가지고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추가 되었습니다. 죄 아래 썩고 부패하여 지옥의 멸망을 면할 수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다시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 위대한 일에 대한 찬양과 증거의 사역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2:9)에서 말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우리를 어둠에서 구원해내셔서 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주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칭송하고 선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용계획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1:3-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거저 주신 구원의 은혜와 그 영광을 찬송하게 하시려는 거라고 말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6:12-13)에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몸을 어떤 도구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칼은 유용한 도구입니다만 사람을 찌르면 살인의 흉기가 되고 의사가 쓰면 사람을 살려내는 의로운 도구요 부엌에서 쓰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복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이루는 도구로 매순간 기꺼이 내어드릴 때 여러분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은 성취되고 여러분 자신은 의롭고 영광스럽고 지극히 보배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여러분을 향한 사용설명서가 참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하나 찾아내서 그 메뉴얼 대로 잘 살아가시면 천사도 부러워할 존귀한 존재로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 창2:1-3 --- 안식일의 원리 진주호 2015.01.26 0 699
다음글 ◈ 창1:26-28 --- 하나님의 형상 진주호 2015.01.02 0 44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증가로 78(연희동)

Copyright © 서부중앙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0
  • Total68,657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