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팔복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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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
진주호 2019-10-08 추천 0 댓글 0 조회 325

마태복음5:1-12 --- 산상수훈 팔복8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

 

1. 팔복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간의 관계를 남녀 간의 사랑을 가지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가서는 육신의 눈으로 읽으면 영낙없는 농도 짙은 연애시인데 실제로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나누어지는 사랑의 특징을 나타내 준 내용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팔복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그 여덟 가지가 모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나타내는 특징들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특징이 상대방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갈증과 허기는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사랑에 빠지면 돈도 필요 없고 명예도 권세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기준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서 자기주장을 포기하고 끝없이 낮아집니다. 자신의 습관이나 태도에 상대방이 싫어하는 요소가 있으면 안타까워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애통입니다. 그 간절함은 온유한 순종으로 이어지고,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한 열정으로도 나타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대한 존중과 사랑도 나타내게 됩니다. 긍휼히 여김입니다. 또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오직 사랑하는 이를 향해서만 마음이 집중되기 때문에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고 순결해집니다. 마음의 청결함입니다. 또한 사랑으로 충족된 사람은 평화롭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주변을 향해서 까칠하지 않고 양보하며 섬길 수 있게 됩니다. 화평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담대한 용기와 죽음도 불사하는 정조와 충성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일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랑의 특징이 하나님께로 향해지는 사람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 팔복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을 딱 한 마디로 정의해 보라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며, 모든 만족과 부유함과 존귀함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께 착취를 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부요하심으로 되돌려주시기 때문에 실상은 가장 복되게 살 수 있는 일절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팔복은 우리가 만들어서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만들어서 가질 수 있다면 복이랄 것도 없지요. 또 만들어서 가지려고 하면 다 가짜가 만들어질 뿐입니다. 팔복의 특징,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그 믿음과 안목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것을 하나님을 향해 그리움과 갈망을 품게 된 영혼, 즉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는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동들을 철저히 따라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열매가 전혀 다른 것들이 맺힙니다.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애통과 온유와 겸손과 화평 이런 것이 열매로 맺어지는데 종교행위를 열심내고 따라한 사람들에게서는 자랑과 교만, 불평과 원망, 위선과 포악이 열매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원래 바리새인 운동의 시초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들은 23차 포로귀환 때에 차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함께 성전을 재건하고 경건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회복시키고, 무너졌던 십일조 생활을 하게 해서 레위인들의 성전봉사가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안식일 준수, 십일조 생활, 율법의 각종 규례에 대한 열심 이런 것들이 유대인들에게 회복되었고 이것이 훗날 바리새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게서는 아름다운 경건의 열매가 맺혔는데 바리새인들에게서는 역겨운 위선과 부패한 권력과의 결탁이라는 흉악한 열매가 맺히더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겉모양을 따라하는 것으로는 진짜 경건의 실체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준수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고, 율법의 규례를 준수하고, 하루에 세 번 기도하고, 일주일에 이틀은 금식하는 등등의 일들로 경건의 겉모양은 열심히 따라했는데 정작 경건 자체는 복제가 안 된 겁니다. 경건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인 건데 금식을 따라하고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은 따라한다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마음에만 생기는 생명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돈에는 고성능 칼라복사기로 복사하려고 해도 절대로 복사가 되지 않는 특수한 부분이 있습니다. 신앙도 그와 같습니다. 단순히 경건해 보이는 종교행위를 따라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까지 복제되지는 않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행위나 일을 배우기보다 앞서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안내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신앙행위들을 배우고 일도 배우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매 주 설교를 들으시면서 그 말씀에 자신을 비쳐보시고, 내가 아무래도 하나님을 못 만난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들면 즉시 상담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보면 그 분들은 안식일이나 십일조나 기도시간 등등의 경건의 겉모양 이전에 하나님께 대한 가슴 뜨거운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둘 다 바벨론에서 전쟁포로 출신의 노예신분에서 왕의 측근으로까지 승진한 대단한 성공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출세를 한 그 두 사람이 둘 다 왕의 옆에서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하는데에는 관심이 없고, 버려진 땅 예루살렘에 가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믿음,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각 사람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듭난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팔복의 말씀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생겨 있는 사람이라야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거라서, 절대로 꾸며서 만들어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로 부르시고 섭리로 이끌고 계신 이유는 바로 이 복을 여러분에게 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최우선적으로 여기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3. 그 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가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자들의 복입니다. 이는 팔복의 하이라이트이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순교적 헌신이 복 중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오늘 본문의 설명은 다른 복들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자세하고 풍성한 약속들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5:10-12>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우리 안에 생긴 거듭난 생명의 면면들이 다 축하받을만한 복이라고 설명하시던 주님은, 그런 특징을 가진 우리를 세상 속에 보내실 계획을 발표하시는데 그게 우리가 듣기에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우리를 박수 받을만한 곳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고, 매우 껄적지근 한 곳으로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잘 못 들은 거 아닌가? 혹시 딴 곳에서는 달리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다른 곳을 찾아보아도 거의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구절을 찾아보아도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얘기는 정확하게 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의 모습이 볼찌어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냄이 하룻 강아지들 틈에 호랑이 사자를 보냄과 같도다그랬으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그런데 정확하게 그 반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을 것이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 영리하게 처신하고, 웬만하면 물어뜯길만한 껀수잡힐 일이 없도록 순결하게 살아가라고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팔복의 마지막 내용과 정확히 일치됩니다. 복된 특징을 가진 천국 백성들이 이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을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의외에도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니고 가는 곳마다 미움과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1) 그것은 우리가 가진 의가 세상이 환영하는 의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경계심 없이 박수치는 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의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님이 빠져야 그들이 환영합니다. 우리가 힘쓰는 정직함, 청렴결백, 희생정신,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는 것, 이런 것들은 다 세상도 환영하는 의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의를 하나님께로 연결시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면 질색팔색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그 의가 세상이 환영하는 윤리도덕 수준의 의가 아니고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의라는 사실을 밝혀 주려고 이렇게 부연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그러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감추고 활동하면 별로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우리를 다스릴 권리가 있으신 하나님의 주권, 심판하실 하나님,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속의 주님,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성령님을 말하기 시작하면 다들 싫어하는 기색을 뚜렷하게 나타냅니다.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떠올리기를 몹시 싫어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죄와 악에 대해서 책망하시며 심판을 경고하시는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사죄와 은총을 간청하기를 요구하시는 권능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싫은 겁니다. 마음이 죄로 부패한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지 하나님께 굴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본성적으로 이를 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자꾸만 그 하나님을 떠올리게 만드는 웬수들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우리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 생기면 할렐루야 그러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여! 그럽니다. 축구 선수들이 골을 넣으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연예인들이 상을 받으면 먼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그럽니다. 심지어는 밥을 먹으려고 하면 앞에서 꼭 머리를 숙여 기도합니다. 그런 모습들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살고 싶은 하나님을 우리가 자꾸만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올리면 자신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심판이라는 주제가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에 떠올리기 싫은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미움이 우리에게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최초의 믿음의 사람인 아벨도 바로 그 미움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러한 세상의 미움이 싫어서 우리의 선행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제하고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 이름만 말하지 않으면 어디서나 칭찬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 이름을 높이 외쳐서 세상을 미움을 기꺼이 받기로 결심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핍박 중에는 우리의 미련함 때문에 받는 핍박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핍박은 받지 않도록 뱀처럼 지혜로울 것과 비둘기처럼 순결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간혹 기독교인들 중에는 온 세상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과도한 열심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단군상을 훼손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미련한 짓에 불과합니다. 절 경내에 들어가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그러면서 구호를 외치는 것도 미련한 짓입니다. 불교의 승려들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그런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심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가십니다. 절 마당에 들어가서 땅 밟기를 하거나 시주를 받으려고 탁발행위를 하고 있는 승려에게 강제 안수기도를 하다가 사진을 찍히고, 그러면 온 세상에 기독교인들은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그런 이미지만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전도의 문을 닫아버리는 미련한 짓이 됩니다.

 

또 한 가지는 비둘기처럼 순결하지 못해서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자의 치명적인 범죄 사실이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의를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기회를 주실 때 스스로 돌이켜 순결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가능하면 쓸데없는 박해를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의를 타협없이 드러내야 할 경우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일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7. 끝으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이 복을 우리는 결코 침울한 마음으로 듣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복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 즐거운 이유가 하늘에서의 상이 크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서의 상이 크다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으려면 그 하늘의 약속이 내가 발디디고 서 있는 이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져야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천국의 보상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지상에서의 보상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우리가 이미 경험한 두 세계를 비교하여 생각해보시면 쉽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상의 포근한 장소였지만 태어나서 누리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똑같은 원리로 지구 위에서 누리는 불과 100년 남짓한 이 삶이 더없이 완전해진 천국에서의 삶과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도 진지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영광은 참으로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크고 영화로울 것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이렇습니다.

 

<로마서8:16-18>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위대한 약속을 가슴에 품으시고 주를 위해 기꺼이 멸시와 조롱과 고난을 감수하는 복된 믿음을 끝까지 나타내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8. 그러나 이 복은 죽은 다음에나 그 혜택을 확인할 수 있는 현세와 동떨어진 약속이 결코 아닙니다. 천국의 위로를 생생한 위로로 받을 줄 알게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도 놀라운 은혜를 누리고 맛보게 능력으로 강건케 되어 살아갑니다.

 

주를 위해 박해를 기쁘게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반증입니다. 주의 사랑을 받고 주를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자신을 꽉 채운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게 됩니다. 당연히 잘되고 형통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요셉이 그런 인물이었고, 다니엘과 세 친구가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어디에 갖다 놓아도 무엇을 하게 해도 자신이 세워진 그곳을 복된 영토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팔복의 모든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도 무엇을 해도 생명으로 충만한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요셉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시키면 성공적인 노예가 되고, 감옥의 죄수를 시키면 모든 사람들을 상담을 해주는 탁월한 죄수가 됩니다. 애굽의 총리를 시키면 가장 성공적인 총리가 됩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기업체 이사를 시키면 능력 있는 이사가 되고, 청소부를 시키면 존경받는 청소부가 되고, 아르바이트를 시키면 복을 몰고 다니는 알바생이 되어서 만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키는 사람이 된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비결은 요셉이 일평생 매순간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까워하지 않는 참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런 사람의 걸음걸음을 지도하십니다.

 

<시편91:9-15>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부디 우리 모두 주를 사랑하여 박해와 모욕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에 도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약속 그대로 여러분의 인생에 다 이루어지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를 향한 사랑을 가슴에 가득 품고 무엇을 해도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감당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놀라운 상이요 천국의 영광입니다. 이 확신으로 기꺼이 주를 위한 박해와 고난까지도 기쁘게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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