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팔복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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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 화평케 하는 자
진주호 2019-10-08 추천 0 댓글 0 조회 326

마태복음5:1-12 --- 산상수훈 팔복6 마음이 청결한 자

 

1. 우리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또 하나의 특징을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팔복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결핍의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보아도 헛되고 헛되다는 느낌을 가지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채워지기 전까지는 자신이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인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는 감각이 살아나서 자신의 비참함을 느끼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애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환경의 궁핍이나 자신의 뜻이 좌절되는 것으로가 아닌 죄의 문제로 슬퍼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을 마주할 만한 선한 것이 들어 있지 않다는 자각 때문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애통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런 죄인의식을 가지고 진실하게 울고 애통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겸손한 항복이 이루어집니다. 그 결과 그 어떤 비난과 공격에도 억울해 하지 않는 온유함이 형성됩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가 아니고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멸시와 조롱 앞에서도 쉽게 격동되지 않는 잠잠함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죄와 영적 결핍을 체념적으로 슬퍼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 속에는 성령님께서 오셔서 거룩한 본능을 일깨우시는데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하는 의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입니다.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의를 추구하면 할수록 우리가 의에 대해서 너무 무능력하다는 사실도 절실하게 알게 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의에 대하여 무능한 상태라서 완전하지도 않고 향기롭지도 않고 늘 실망스럽게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 깨달음은 우리에게 자신과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게 해줍니다. 자신도 다 지키지 못하는 율법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피차 완전한 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허물 많은 모습을 불쌍히 여길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사람은 궁핍과 애통하는 죄인의식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로 자라가려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특징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얼핏 잘못 이해하면 마음을 비운 사람을 모든 욕망을 비운 사람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라고 가르치는 텅 빈 마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의 청결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는 마음의 집착과 욕망을 자신의 노력으로 완전히 비울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워 해탈을 하면 신보다 더 뛰어난 부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음을 비웠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하나님을 부인하는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 입각한 지혜로운 통찰이 필요합니다. 최초의 인류에게 마귀가 뱀을 통해 다가와서 유혹한 것이 바로 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3:4-5>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마귀 유혹의 본질은 하나님을 제끼고 네 스스로 신이 되어 선악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절대자유를 누리면서 주체적으로 살아라!” 이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해탈해서 부처가 되라는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의 청결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탐욕과 집착을 버려서 무념무상의 해탈을 이루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무엇이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까? 해탈에는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이 빠졌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과 같이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마귀의 거짓말이라고 일깨워줍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은 그냥 마음만 비우는 명상을 해가지고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알려주신 진정한 복은 해탈을 해서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만드는 이유와 목적이 자아도취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뵙기 위한 청결입니다. 이 기준을 놓치면 마귀의 거짓말에 언제나 속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해지는 방법도 전혀 다르게 접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면 명상을 하고 도를 닦으려고 합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말을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제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고 하는 교만이라는 악의 실체는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청결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팔복의 그 순서와 구조를 주목해야 합니다. 팔복 말씀의 처음 세 가지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함이었고, 둘째는 애통함이었고, 셋째는 온유함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율법에 우리 자신을 비쳐보았을 때, 알게 되는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자각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그 비참함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거나 말거나 돈만 있으면 좋고, 몸만 건강하면 만사가 오케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불행한 느낌도 고통도 전혀 느끼지 못하면 우리의 심령은 엉뚱한 것으로 배불러 있는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갈망을 말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다른 것으로는 결코 충족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돈도 있고, 건강도 있고, 모든 것이 다 제 자리에 있어도 그 사람이 없으면 못살겠는 느낌, 그가 없으면 살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지는 그 절실한 결핍의식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바로 그런 사랑으로 인한 강렬한 결핍의식을 느끼는 사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 비참한 느낌을 생생히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는 심령은 곧 애통하는 눈물을 쏟게 됩니다. 자신 속에는 온통 하나님을 거스리는 악한 욕망들과 무례한 무관심이 가득하여 원하는 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느낄 수 없는 것이 슬퍼서 서럽게 울게 됩니다.

 

온유함은 그 애통함이 바닥을 친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셔서 이 세상 무엇에도 부귀도 명예도 육신의 행복도 더 이상 내 인생의 큰 이슈가 되지 않는 것이 온유입니다. 내면으로는 죄인 의식으로 자아가 철저히 낮추어져서 다른 사람들이 혹 비난하고 정죄하는 소리를 해도 편안하게 수긍하는 상태입니다. 체념과 굴종의 온유가 아니라 죄인인 나를 받아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미 충족된 평안과 자유함이 온유입니다.

 

여기까지 도달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어 있습니다하나님께로 향한 간절한 의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거룩한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이후의 세 가지 복의 상태가 더 전개 되는 데 긍휼히 여기는 자이며, ‘청결한 마음이며, ‘화평케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묵상해 보면 긍휼히 여기고 청결한 마음이 되고 화평케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처음 세 가지 내용들과 각각 짝을 이루는 마음의 열매들인 것을 알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결핍 증세를 앓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어떤 노력을 해도 하나님께 합당할만큼의 거룩을 이루지 못하는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용서와 사면을 받고도 또 다신 허물과 죄로 더럽혀지는 매일매일을 경험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자체가 불쌍하게 여겨집니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딱 봐도 화평케 하는 사람과 짝이됩니다. 우리는 온유함을 자아가 죽은 상태라고 풀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성격이 유순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다혈질이든 낙천적이든 구분 없이, 자아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상황이나 사람에게 짓밟혀도 제멋대로 고개를 들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자아를 하나님께 복종시킨 사람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어떤 말에도 어떤 행동에도 으르렁거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용서와 긍휼의 말을 하게 되니 모든 갈등과 다툼을 잠재우고 평화를 이루게 됩니다.

 

세 사람이 모였는데 선물이 하나 모자라면 삐지고 비난하는 다툼이 생기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주의 명령대로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준다면 그곳에는 곧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서로 힘들고 궂은 일을 하기 싫다고 싸움이 일어났는데 네가 해라!’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누군가가 가장 굴욕스럽고 가장 더럽고 가장 힘겨운 일을 도맡아서 감당한다면 그들 사이에서 당연히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의 평화는 대부분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그 누군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화평케 하는 당사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 위에 매달도록 자기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팔복은 이런 식으로 짝을 이룹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마음이 청결해 지는 방법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청결은 애통하는 것과 짝을 이룹니다. 울며 애통하는 사람이 마음이 청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마음이 청결해지는 방법은 명상이 아니고 회개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통회와 자복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죄의 요소들을 찾아내서 그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께 자복하며 울고 또 우는 것입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사악함을 인정하고 그 사악함을 붙들고 매일 울고 또 울다보면 청결한 마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물이 사악한 마음을 씻어낸다는 뜻이 아니고, 울며 간청하는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새마음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아파하고 그 비참함을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이고, 황폐한 자신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주시기를 성령께 부르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시편에 곡조를 붙인 노래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 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고,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이것이 다윗이 정결해진 방법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자신 안에 깊은 죄의 마음이 숨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공하고 편안해졌을 때 어느 한가한 날 오후에 그의 내면에 있던 죄가 다윗의 심장을 쏘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밧세바라는 여인에게로 향하여 생긴 탐심을 멈추지를 못했습니다. 그녀가 충직한 신하 우리아의 아내라는 사실도 그를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밧세바를 범했고, 임신이 되자 그 사실을 간교한 술책으로 은폐시키려 했고, 뜻대로 안 되자 우리아를 비열한 방법으로 죽였습니다.

 

우리는 죄에게 유혹당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내가 썩 괜찮은 사람인 줄로 착각합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부끄러운 짓은 안 하고 살았어! 그건 결코 자부심을 느끼며 자랑할 내용이 아니고, 단지 감사할 내용입니다. 여러분의 노력과 실력이 깨끗한 삶을 살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여러 겹의 사랑의 줄로 묶어두신 것입니다. 유혹될만한 대상이 나타나고 자극될만한 상황이 주어지면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마음대로 뛰어나와서 춤을 추고 광기를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타락해서 죄인들이 되었다. 이 사실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내가 체면과 환경과 기질과 책임감과 여러 가지의 사랑의 줄로 꽁꽁 묶어두어서 내면의 죄가 튀어나올 기회를 못 가진 죄인들이 있고, 줄에서 풀려나와 대책없이 죄를 저질러본 죄인들이 있고, 세상에는 딱 이 두 종류의 사람 밖에는 없다. 정결한 사람은 없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긴개긴, 도토리 키재기 정도의 고만고만한 죄인들뿐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입니다.

 

정결함은 표면적인 윤리도덕을 지켰다고 정결한 것이 아니고, 자신 속에 들어 있는 그 죄의 실체를 발견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단지 줄에 단단히 묶여 있어서 죄를 저지를 기회를 못 가진 것뿐인 죄인들이 나는 나쁜 짓을 안 했으니까 깨끗해!’ 이럴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더럽고 자기들은 거룩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로 하십니다. “나는 겉으로 드러난 네 모습이 아닌 네 속을 들여다 보는 하나님이다. 네 안에는 나를 진노하게 만드는 온갖 종류의 악이 가득하다!” 그러십니다.

 

거듭난 사람, 복된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의 내면에 들어 있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라고 했습니다. 간음하지 않았지만, 간음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이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더러움으로 인식해야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내 안에 몹시도 위험한 죄가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사랑의 줄로 더 꽁꽁 묶으셔서, 일평생 주께 속박되어 있게 해 주옵소서!” 그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다윗은 죄가 자기를 삼킨 후에야 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울며 애통합니다.

 

<시편6:1-2; 6>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편51:10-13>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애통한 눈물이 별로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큰 죄를 지으면 애통하게 될까요? 전혀 아닙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성령으로 각성되지 못한 강퍅한 마음 상태로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못합니다. 오직 핑계만 댑니다. 내가 죄를 짓게 된 것은 부모 탓이고 환경 탓이고 조상 탓이고... 그러면서 메마르고 황폐한 채로 더욱 죄로 굳어질 뿐입니다.

 

마음이 청결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회개의 영을 구하셔야 합니다. 다윗처럼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라고 애절하게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비참함을 다 드러내시고 우리 생각과 마음의 갈피갈피에 숨어있던 그 추악하고 역겨운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비우고 소멸시키게 해주십니다. 정결케 하는 것은 내 눈물이 아니고 주의 성령이신 것입니다.

 

5. 지금까지 우리는 정결해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다음 문제는 마음이 정결해진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말은 곧 통회하고 자복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울며 회개한 사람의 육신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신다는 뜻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일차적으로는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확연하고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천국에서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런 말로 표현했습니다.

 

<고린도전서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나 이러한 약속은 천국에 가서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눈물과 애통함으로 마음이 낮아지고 청결해진 사람에게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거만하고 마음이 둔해서 도무지 하나님을 의식하지도 못하던 사람이 회개하고 애통하다 보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6. 이 민감함 속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이런 식인 겁니다.

 

어떤 격동되는 상황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서 예배에 참석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예배에 가면 뭐하나 그러면서 예배를 제끼고 스트레스 풀러 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런 상태 그대로 진솔하게 다 가지고 주 앞에 나오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나왔는데 그날 찬양 인도자가 고른 찬양이 나의 안에 거하라같은 것이 나오는 겁니다.

 

두려워 하지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라.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이런 찬양에 동참하다 보면 마음이 조금 차분하고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설교 말씀에서도 같은 메시지가 나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회개하고 겸손히 낮아진 사람들은 이럴 때 바로 알아듣습니다. “! 주님께서 내게 말을 걸고 계시는구나!” “알았어요, 하나님! 낙심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을게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보이고 들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자각과 애통함으로 회개하지 않은 완강한 사람들은 이런 거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냥 화가 잔뜩 난 상황만 있고,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리면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잔뜩 받고 그러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매순간 모든 상황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듣고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명절 중에도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이런 마음으로 주를 뵈면서 큰 위로와 기쁨 속에서 지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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