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팔복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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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긍휼히 여기는 자
진주호 2019-10-08 추천 0 댓글 0 조회 357

마태복음5:1-12 --- 산상수훈 팔복5 긍휼히 여기는 자

 

1.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로는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불쌍히 여길 긍() 동정할 휼(),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는 그 자체가 하나님 자녀로서의 특징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누구를 불쌍하게 여길 것이냐 이 문제는 말씀해 주지 않으십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복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런데 입장을 바꾸어서 누군가가 나를 불쌍하게 여겨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좋습니까? 싫습니까? 우리는 내가 남을 불쌍히 여겨주는 건 좋은데, 내가 남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나보다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팔복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 과연 나는 비교적 넉넉해서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줄 수 있는 것을 말할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일단 그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라는 명령은 분명히 성경이 매우 강조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가난한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못하도록 세밀한 점까지 챙기시는 명령을 해 주셨습니다.

 

<신명기15:7-11>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잠언서에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직결시키면서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잠언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잠언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21:13>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긍휼히 여기라는 명령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긍휼을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오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보고 계신 면전에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2.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대한 긍휼과 사랑은 비단 언약백성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약한 자들에게 대한 돌보는 사랑은 인류가 가진 보편적인 공통정서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의 본성에다가 선한 양심을 새겨 놓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 증거로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있어 왔습니다. 나라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면 사람들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제도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존재 속에 그런 착한 마음들이 구성요소로서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 마음속에 기쁨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조 후에 죄가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오염시켜서 이 사랑의 마음은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이기심과 인색함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아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품 속에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베푸셔서 이 세상 어디에서고 보편적인 긍휼과 사랑의 실천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어제 토요일에는 우리 아브라함 어르신들이 주일 준비를 하시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한창빈 집사님이 수줍게 웃으시면서 목사님, 나이가 들어가니까 내가 좀 이상해지는 거 같아요. 어제 집에서 바퀴벌레가 한 마리 기어가길래 탁 때려 잡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불쌍한 거예요. 살려고 나와서 꼼지락 꼼지락 하며 기어가는 것이 불쌍하더라구요?” 그래서 어쩌셨습니까? 그랬더니 또 한 마리가 지나가길래 살려줬어요.”

 

그게 왜 그러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본성에 만들어 놓으신 측은지심의 공감능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한집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고타마 싯탈타가 생각이 났습니다. 석가모니가 출가를 결심하게 되는 동기 중 하나가 바로 한 집사님과 같은 경험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 전에 인도의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난 석가는 소년시절에 아버지 왕과 함께 농경축제에 참석했습니다. 농부들이 쟁기질을 해서 흙을 뒤집자 그 속에 쟁기 날에 몸체가 끊긴 지렁이와 벌레들이 꿈틀거렸고, 그 벌레를 참새가 쪼아서 날아가고 그 참새를 솔개가 채가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비참함을 느꼈다는 거예요.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렇게 약육강식의 질서로 비참한가! 그런 철학적 사유를 해나가다가 인간이 해탈하면 부처가 된다는 도를 인류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는 미물에도 불성이 있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바퀴벌레나 자신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생각인 거죠. 제가 한 집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한 집사님, 석가모니는 하나님보다 더 착한 척하고는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말라고 했어요... 그가 표방한 것은 그렇게 착한 척했는데 정작 가르친 내용은 누구든 피조물들이 해탈을 하면 신조차 초월하는 부처가 된다고 가르쳤어요.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피조물들이 자기들끼리 부처가 되었네 신이되었네 하는 그 소리가 바로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바로 그 소리라고... 바퀴벌레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기보다 사람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저는 살생에 대한 그 사람들의 생각에 동조를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은 동물만 죽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식물들도 다 생존본능으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존재들인데 그것들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행위 자체가 살생 아닌가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식물과 동물들을 우리의 먹을거리로 주셨으니 감사히 맛있게 드시면 됩니다.

 

3. 어쨌거나 우리 속에 측은지심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비록 죄 때문에 많은 부분이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지만 이런 종류의 긍휼과 사랑도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 형상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이 긍휼의 실천도 성경에서 매우 강조하여 가르치십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율법의 명령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지 못하도록 못 박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멸시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엄포까지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기적의 떡으로 먹이실 때에도 그 마음의 동기는 이 불쌍히 여기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8:1-3>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이러한 우리 주님의 긍휼의 시행은 그들의 영혼구원 이전의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당장 눈앞에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만나시면 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기적을 행하신 사례가 여럿 있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병을 치유해 주셨는데 그 중에 아홉은 감사도 없이 가버렸음에도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런 점으로 보건대 우리는 힘이 있을 때, 항상 나눔과 돌봄을 실천하고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내 즐거움을 위해 돈과 시간을 쓰기 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고 돌보기 위해서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중히 보시는지를 잘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팔복에서 말씀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으로서의 긍휼히 여기는 것은 약자를 돌보는 윤리적 사랑의 실천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을 말하는 긍휼입니다. 우리의 긍휼은 팔복이 말씀하는 긍휼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어찌보면 사회적으로 돌봄을 받아야 하는 극빈자들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은 물론 자신의 인생이 결코 만만치는 않지만 자기가 도움을 받고 불쌍히 여겨지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말씀을 남을 불쌍히 여기라는 뜻으로만 이해하지 자신들도 그 불쌍히 여김의 대상들이라는 사실은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팔복에서 긍휼히 여기라는 것은 육신적으로 가난한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는 다 불쌍한 존재들이니 서로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남을 불쌍히 여기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불쌍하고 비참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의 안목은 곧 하나님의 안목인데 하나님께서 보시는 우리의 모습은 육신이 가난하고 병들어서 비참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훨씬 더 비참한 것이 우리 모두의 영적인 형편이다! 그렇게 보고 계십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인생조건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시선이며, 하나님의 진단이십니다.

 

그 진리를 성경 전체에서 이사야서 55장만큼 분명하게 나타내주시는 말씀이 따로 없습니다. 이 구절은 서부중앙교회 성도들은 거의 대부분 외우듯이 알고 계셔야 할 말씀입니다. 그만큼 제가 자주 인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55:1-7>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여기에 묘사되는 목마르고 허기진 사람들은 육신의 목이 갈하거나 육신의 배가 고픈 사람이 아닙니다. 행복을 찾아서 몸부림을 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하는 인류 전체를 지칭하시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 모두를 철저하게 불쌍한 존재로 묘사하십니다. 그 불쌍함의 이유는 죄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그분과 대적하고 있는 죄인들의 비참함을 목마름과 허기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구원의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구분 없이 비참한 자들이고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앞서서 말했던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윤리적인 내용은 온 세상 모든 나라와 민족, 모든 개인개인의 양심에 새겨두신 보편적인 긍휼의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이 문제를 비참하다고 인식하고, 바로 이 문제로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야 한다는 관점은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동정심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주제는 경제적인 빈곤을 겪고 있는 가난한 자나, 여러 가지 삶의 이유 때문에 소외되고 따돌려진 자들에 대한 윤리적 접근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긍휼히 여기는내용은 우리가 돈이 없고 병들어서 불쌍하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진노와 형벌의 대상들이기 때문에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긍휼은 가난한 자, 부한 자, 높은 자, 낮은 자 등등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인간존재의 비참함에 대한 긍휼인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불쌍하고 모여 있어도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혼자 있으면 한 없이 외로워서 절망하고, 같이 있으면 서로 갈등을 빚으면서 미워하고 절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대절명의 숙제를 안고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신음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신 대상은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기 이 약속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오신 다윗의 후손이신 우리 주님은 오셔서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힘을 다하십니다. <마태복음11:28>에서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시선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영혼이 목이 마르고 허기가 진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와 하늘의 양식으로 제공하셨습니다. 비난과 정죄만 받던 우리 죄인들이 긍휼이 가득한 주님의 눈빛을 만나고 용서와 회복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어둠과 절망에 찌들던 우리의 삶이 소망과 생기로 충만해집니다.

 

팔복이 말하는 긍휼은 여기까지 도달해야 하는 긍휼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고 비참한 자였는지를 철저히 깨닫고 동일한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팔복에서 거듭난 사람들은 바로 그런 특징을 복스럽게 나타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5. 우리가 긍휼의 시선을 여기까지 끌어 올리게 되면 긍휼의 대상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이라는 조건 아래 살고 있는 서로서로가 다 불쌍하게 보여야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완벽하게 살지 못하는 한계 속에 전전긍긍하며 지냅니다. 그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쌍한 감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에베소서4:31-32>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각자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들을 버리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자주 실패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서로서로를 불쌍히 여겨주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더 어려운 권면까지 우리에게 합니다.

 

<베드로전서2:18-19>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조금 더 일상적인 언어로 읽으면 이런 뜻입니다.

 

남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은, 그 주인에게 진정 두려운 마음으로 복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뿐만 아니라 고약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며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고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란 아담에게서 태어난 우리의 본래 마음으로는 심히 어렵습니다. 그런 마음은 오직 성령님의 일깨우심을 통해서 내 자신도 얼마나 고약을 떨 수 있는 인간인지를 깨닫고 회개하며 울어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들만이 착한 사람 나쁜 사람 구분 없이 인간의 영혼 자체를 불쌍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영적인 긍휼히 여김을 잘 실천하고 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후원금을 보내고 그런 일들은 평소 마음 주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이건 우리 육의 본성에 새겨진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어쩌면 마음의 여유만 가지면 쉽게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못하고 정말로 잘 안 되는 일이 별로 불쌍해 보이지 않는 서로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일입니다. 이건 영적인 사람이라야 실천할 수 있는 덕목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첫 번 째로 긍휼히 여길 대상들은 다름 아닌 서로서로입니다. 서로 한 번 쳐다보세요. 무엇이 불쌍한가? 한 집에 안 살아서 잘 모르시겠죠? 그러면 부부들끼리 가족끼리 서로 쳐다보세요. 불쌍한가요? 무엇이 불쌍한가요?

 

이런 겁니다.

 

우리는 피차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런 명령을 함께 받았는데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은 거룩과는 거리가 멀고 아이고, 니가 그렇지 뭐!!!” 이런 느낌이 들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린 서로 공격할 일이 아니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기뻐하시는 거룩함을 이루려고 노력해보면 너무나 자주 절망감을 느끼듯이 상대방도 그게 잘 안 되는 거니까!!! “우린 참 갈 길이 멀구나. 우리는 참 불쌍하구나!!!” 그래서 공격하지 말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손잡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줘야 합니다. “괜찮아! 다시 할 수 있어. 주께서 기회를 주시고, 교회도 기다려주고, 나도 당신을 기다려 줄 테니 포기하지 말고 다시 용기를 냅시다

 

두번째 대상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를 핍박하고 죽이는 원수들까지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주님께서 먼저 강력한 모범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누가복음23:33-34>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 모습을 나중에 순교자 스테반이 그대로 따라 합니다.

 

<사도행전7:59-60>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핍박과 순교의 자리에서 우리를 고문하고 죽이는 자들을 과연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길 수 있을지는 닥쳐봐야 알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평상시에 서로서로조차도 불쌍히 여기지 못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원수를 불쌍히 여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복된 사람들이 맞다면 우리는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일을 부지런히 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러지 말고 부디 서로를 더 많이 더 자주 불쌍히 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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