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팔복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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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진주호 2019-10-08 추천 0 댓글 0 조회 408

마태복음5:1-12 --- 산상수훈 팔복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1. 산상수훈의 팔복은 여덟 가지의 복을 받게 되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팔복은 구원받은 사람의 여덟 가지의 특징을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 사람이 진정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그런 뜻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복 받았다는 것입니다. 복이 있나니 하고 반복하는 뒷 부분은 다 구원의 복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이 말은 영원하고 완전한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뜻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영원한 천국의 지분이 상속될 것이다). 배부를 것이다(의에 주리고 목마름에 대한 배부름이니까 완전한 의를 누리고 살 수 있다 그런 뜻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어떤 연약함에도 버림받지 않고 용서와 긍휼로 안전하게 영생에 입성할 것이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천국에서의 가장 큰 기쁨은 한 점의 티끌도 없는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화평케 하는 자의 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인데 사랑으로 완성되는 우리 믿음의 결국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고, 우리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가족으로 격상될 것을 말합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다시 처음 복의 반복이고)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클 것이다.(천국은 시시한 곳이 아니고 이 땅에서 행한 지극히 작고 사소한 일들도 다 인정을 받고 영원히 기념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여덟 가지의 약속은 모두가 다 천국에서의 위로와 보상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위로와 보상! 그러니까 기독교라는 것이 죽어서 천국 가서나 보상을 받고 땅에서는 다 참고 인내하고 견디는 것으로만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카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에게 환상의 행복인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인민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는 종교가 고통에 대한 환상적인 위로를 줌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현실의 억압과 착취에 대해서 순응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의 억압과 착취에 분노하고 혁명의지를 불태워야 하는데 종교가 그 의지를 나약하게 만든다고 싫어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특히 기독교를 배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의 위로는 죽은 다음에 내세에서는 맛볼 수 있는 위로가 아닙니다. 천국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의 현실 속에 임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죄로 인해 어지럽고 무질서하고 황폐했던 내 안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다스리심으로 모든 의로움과 질서와 조화와 생동감이 회복되는 것이 천국의 위로입니다.

 

인간들의 비참함은 단순히 경제적인 불평등이나 가난을 해소시켜 준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에 의해서 인류는 복지국가를 만들고 기초생활을 보장해주고 의료혜택과 교육혜택 등을 보장해 주었지만 유토피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소위 선진국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그렇게 높지 못하고 자살율 또한 제일 높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천국의 위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지금 오셔서 그분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면 그 사람의 마음속이 천국이 되면서 그 사람에게 현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 결과 그가 있는 곳,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 천국으로 변화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의와 평강과 희락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열 두 형제는 한 사람 한 사람 죄로 인하여 비루하고 포악하고 간교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격하게 미워하고 증오하였습니다. 그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렸을 때 그들이 만들어내던 모습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 각자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천국은 죽어서나 가서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서 용서와 화평과 사랑으로 변화되어 그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천국의 복은 심령의 가난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외로움과 절망과 두려움을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천국의 시작입니다. 생생한 통증은 신경이 살아있다는 표시입니다. 허기와 갈증도 생명의 표현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면 이 감각이 뚜렷해집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돈만 있으면 아무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는데 성령께서 개입하신 인생은 이제 돈과 성공과 건강과 쾌락이 있어도 만족되지 않는 갈증과 허기를 계속 느낍니다. 하나님께 대한 갈망인 것입니다.

 

그런 심령의 가난함은 곧바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의식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누추한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실제적으로 애통하는 심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입으로는 나는 죄인입니다그러는데 그 마음에 죄에 대한 애통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거짓말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죄인의식은 애통과 회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죄와 허물이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매순간 회개하며 애통하다보면 어느덧 온유함에 도달하게 됩니다.

 

온유함이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평화입니다. 스스로의 죄인의식이 너무도 분명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경멸하고 욕해도 그 말이 맞다고 인정할 정도가 되는 마음, 그것이 온유라고 했습니다.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낮아져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늘 부끄럽고 누추한 존재로 자각하는 마음이 온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네 번째 특징인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그 온유함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거듭난 증거 중 하나인 것입니다.

 

2. 세상 사람들도 산상수훈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듣기에도 예수님의 이 말씀들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기 때문에 산상수훈의 모든 교훈은 단지 윤리적인 교훈으로만 해석합니다. 그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묘사해 보라고 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의인 열사들을 나열할 것입니다. 김구 선생이나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이런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으로 꼽혀집니다. 자신들의 안위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의로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에도 자신들의 생명을 먼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구하다가 숨진 이들이 있어 세월호의 다섯 의인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박지영 승무원 22) 4층에서 구명조끼를 구해 3층 학생들에게 건네며 가슴까지 물이 차올라도 마지막까지 승객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은 맨 마지막이야그랬대요.

(정차웅 군 17)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네고 다른 친구들을 구하려다 자신은 숨졌습니다.

(남윤철 교사 35) 방에 물이 차오르자 빨리 빠져나가라며 학생들을 대피시키고 본인은 숨졌습니다.

(최혜정 교사 25) 급박한 상황 속에서 10여명의 학생을 구하며 걱정하지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께그랬답니다.

(양대홍 세월호 사무장 46) 배가 현저히 기울자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랍니다. “배가 많이 기울어져 있어. 수협 통장에 모아둔 돈 있으니까 큰 아이 등록금으로 써.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해. 길게 통화 못해 끊어...)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아이 등록금 대책까지 일러주고는 학생들을 구하러 가서 순직하였습니다.

 

이분들은 우리 사회의 영웅들입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거나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지 않고, 또 결코 무가치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누구 못지않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인권을 위해서 힘을 쓰고, 또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을 때에, 세상의 불의와 싸울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뒤로 물러서거나 도망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산상수훈에서 말하고 있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의로움의 한 열매이기는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실체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보다 근원적으로 하늘나라 주인공들이 가진 특성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3.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첫째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과 그분과의 더 깊은 사귐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아주 의롭게 창조되었습니다.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가장 의롭고 존귀한 자로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천사들처럼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고, 그분의 형상을 가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더 깊게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그분의 영원한 반려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반역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졌고 우리 안에 충만하던 의로움은 다 오염되고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망가진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자신들 안에 형성된 죄의 수치심 때문에 숨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친히 찾아와주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늘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의를 상실한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성경 말씀 전체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백성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선지자를 끊임없이 보내셨습니다. 싫어해도 보내고, 핍박해도 보내고, 죽여도 보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영원하신 독생자, 하나님과 동등 된 성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십니다. 전도자들을 보내시고, 복음의 일꾼들을 보내십니다.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보내십니다.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저 북극과 남극에도 보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학교로, 직장으로, 거리로, 집집으로 보내십니다. 이것이 지금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미시는 사랑의 손길이요 구원의 손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사랑은 수없이 외면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위에 못 박아 죽이고 그분의 사도들을 핍박하여 죽게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거절과 반항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근본적인 문제가 자신들 속에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의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울며 애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애통의 끝에 자아가 죽은 온유함도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알아갈 수록 우리는 비난과 공격을 당해도 억울해 하지 않고 죄인됨을 인정하는 사람들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그 온유함의 상태 자체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품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고 싶은 열망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4. 주님께서는 이런 상태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복되냐면 그들의 그 열망대로 채우심을 받아서 마침내 배부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배부름은 우리가 만들어낸 부족한 의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행을 하고 의를 추구해도 항상 그 속에 먼지와 티끌이 뭍어 있습니다. 인간들끼리는 서로 칭찬도하고 자랑할만 한 의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에는 역부족인 오염된 의일 뿐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의에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완전한 의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충분히 배부르게 하고 온 우주와 만물을 충만케 하고도 남을 완전한 의가 이렇게 선포됩니다.

 

<로마서3:20-24>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이 우리를 배부르게 해주시는 위대한 약속입니다. 내 손에 하나님께 가지고 나갈만한 온전한 의가 없어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더니하나님께서는 그 빈손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를 선물로 들려주시는 겁니다. 그 의를 내게 옷으로 입혀 주시면서 이것 가지고 내게로 나오렴그러신 것입니다.

 

우리의 제물과 선행은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미가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의가 어떤 것인지를 밝히십니다.

 

<미가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안에 만들어 주신 용서와 긍휼의 옷을 우리가 입고 날마다 의를 추구하면 그 갈망을 채움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를 옷으로 입고 그 사랑 안에 거하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배부름입니다.

 

5. 두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성화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신자는 칭함을 받는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하듯이 처음에는 비틀비틀 뒤뚱뒤뚱 하면서도 걷고 뛰기를 열망하며 자라게 된다 그 말씀입니다.

 

걷고 뛰는 2살 박이 아이들은 아직 또렷한 언어구사는 못합니다. 얘네들 한테 말을 시키면 지들 나름대로 뭐라뭐라 한참을 말을 합니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이들이 장차 제대로 된 문장으로 의젓하게 말을 할 거란 사실을 즐겁게 기대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그럴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태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뒤뚱대면서도 걸으려고 하고 의사전달이 제대로 안 되어도 무언가를 힘을 다해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일이 전부 부족하고 불완전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보다 더 잘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금 더 잘 하고 싶은 이 열망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뒤뚱대는 2살박이가 제 걸음걸이에 만족하고 걷기 연습을 멈춰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알아듣든 못알아듣든 무언가를 끊임없이 종알대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준과 의를 이루기 위해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열망하는 것이 우리의 특징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고, 그 열망은 반드시 열매로 자라갈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걸음마 수준 옹알이 수준의 의의 추구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하고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 출석이 걸음마입니다. 나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듣고 경배해야 하나님을 알아가지요. 날이 풀리면 기관별로 점심시간에 홍제천으로 둘씩둘씩 띠두르고 나가셔서 전도지도 나눠주는 행사를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전도지 한 장이라도 돌리는 걸음마나 옹알이를 하셔야 복음의 증인으로 자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6.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상이 기대하는 의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로운 노력 말입니다. 저는 원로목사님의 삶의 태도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청년시절과 30대 시절에는 그냥 불같은 성격을 가지신 무서운 분이라고만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불같은 성격까지도 하나님께로 향하는 열정이라고 보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하신 말씀 중에 기억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따셨다는 거예요. 왜 하셨는지 이유가 길을 가다가 자동차 사고나 자전거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다치거나 쓰러지면 그 상황에 뛰어들어가서 교통정리를 하거나 2차 사고를 방지하는 안전조치를 하거나 인공호흡을 시키거나 이런 일들을 잘 해내시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이런 모습은 우리 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품을 사회적인 선행으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좋은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정이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열심을 다해 학업에 매진하는 학생으로, 정직하고 성실한 직장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세상 사람들 앞에서 발휘되게 평소에 준비하고 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마다 의로운 행위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것은 평소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많아지면 그들이 속해 있는 가정이 밝아지고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일하는 직장이 활기에 넘치고 성과가 올라갈 것입니다. 청소년들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주변의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게 될 것입니다.

이런 행복한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로 인정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주리고 목마릅시다. 2) 믿음과 성품이 자라기를 끊임없이 목말라 합시다. 3) 선행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꿈을 꾸십시다. 이렇게 살면 우리가 있는 곳 어디나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충만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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