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팔복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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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온유한 자
진주호 2019-10-08 추천 0 댓글 0 조회 335

마태복음5:1-12 --- 산상수훈 팔복3 온유한 자

 

1. 온유하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화를 잘 내지 않고 마음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성품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미덕으로 여기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결국 착하게 살자는 거구나하고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이란 팔복 전체가 묘사하는 구원받은 사람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그냥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운 것 때문에 복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온유함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착한 것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착해도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는 도무지 맺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2. 또 한 가지는, 온유함이 단지 우리 성품을 다듬어서 착하게 사는 문제라면 우리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 이유는 우리 중 대부분도 다들 기회만 있으면 한 성질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도 성질 급한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시면 성질 급한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시다가 동네 사람들이 길을 막고 못 지나가게 하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말합니다.

 

<마가복음3:16-17>에서 주님은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시는데 시몬에게는 베드로, 바위라는 별명을 지어주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우뢰의 아들들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습니다. 이는 야고보와 요한이 그만큼 격한 성질의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구약의 모세 또한 만만찮은 다혈질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동족을 못살게 구는 애굽인을 앞 뒤 재지 않고 바로 쳐 죽인 성질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질 사납기로 하면 베드로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칼을 들고 설쳤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서신서들을 읽을 때에는 그렇게 온유하고 착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도바울도 원래의 성격은 과격파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설교할 때 스데반을 죽여야 한다고 맨 앞에서 선동했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7:58>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하고 되어 있는데 돌로 치는 사람들의 옷을 맡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에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26:9-12>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이 회심하게 된 간증을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사도행전26:9-12>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했다는 말은 일제시대의 형사나 독재시대의 고문경찰과 같은 악랄한 고문과 핍박을 가한 사람이 바울 자신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천성이 온유한 자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독하고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인물들의 사정이 이렇다면 과연 주께서 말씀하시는 온유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천성적으로 착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한 성깔 하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온유해질 수 있겠구나그러나 그것은 희망이자 동시에 책임이기도 합니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이 말씀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 기준이 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필연적으로 온유해지는 증거가 있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질을 잘 내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성질이 꺾여서 온유해지는 증거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 천국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성질을 다 부리고 사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자아의 혈기에 대해서 안타까운 눈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진정한 천국백성이라면 온유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이십니다.

 

우리가 위에서 열거했던 한 성깔 했던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만나고는 온유한 자들이 됩니다. 베드로는 우락부락 소리를 지르던 인물에서 열정적이지만 교만하지 않은 인물로 변화되어 활동합니다. 그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으로 초대되어 가서 설교를 할 때 그에게서 온유함이 느껴집니다.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고, 사도 요한의 복음서와 그의 서신서는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격정적인 천둥의 아들이었지만 훗날에는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가 생애 마지막 목회를 했던 곳은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100세에 가까워져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누워있는데 성도들이 침상에 누운 채 강단에 올려놓으면 고개만 돌려서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온 회중이 울음바다가 되곤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 방에 사람을 쳐 죽이던 모세는 그의 일평생에 성령님께로부터 온유함을 인정받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민수기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는 반드시 온유해져야 합니다. 온유하지 못하고 일평생 씩씩대면서 사는 사람은 천국백성이 아니거나, 천국백성으로서의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철부지 어린애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3.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온유함이 천성이 착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닥씩을 하던 그 성질 급한 인물들을 하나같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든 이 온유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팔복이 묘사하고 있는 특징들이 차례대로 적용된 성품의 열매와도 같은 것입니다. 제일 먼저 등장했던 것이 심령의 가난함이었습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하나님께 대한 의식이 깨어나서 이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갈증과 허기를 느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의 불결함과 비참함이 느껴져서 울며 애통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애통함의 끝에 찾아오는 철저한 자기부정! 그것이 바로 온유함의 실체인 것입니다. 애통해 하는 것이 신자의 내면적인 고백라면 온유함은 겉으로 드러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하기는 잘 하지만 생활 속에서 누군가에게 변변찮은 놈하고 말을 들으면 별로 잘 참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진정한 온유함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온유함이 성질나는 것을 잘 참는 내 인내력이라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조금 부족한 이해입니다. 참아야 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비참함을 알면 온유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부패하고 사악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몸부림치며 울어 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선으로 포장하지 못합니다. “나는 정말 부끄러운 죄인이구나!” 그런 의식에 깊이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죄인의식에 절실하게 도달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을 모욕하는 말을 해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온유함이라고 부르십니다. 세련된 인내심을 가지는 것이 온유가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비참한 죄인이라는 자각 때문에 잠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온유라는 겁니다.

 

미친놈그러면 그래 내 안에는 미친 본성이 가득하지.” 그러고, ‘더러운 놈그래도 맞아 내가 정말 더럽지...” 그렇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 온유함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우리가 자주 쓰는 다른 표현으로 하면 자아가 죽은 것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이고, 천국의 백성들은 밟혀도 꿈틀하지 않는 쪽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팔복이 말하는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거듭난 천국의 백성들은 모두 이 특징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사무엘하16:5-13>에서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이런 종류의 온유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사무엘하16:5-13>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여기 압살롬의 반역으로 권좌에 쫓겨나 맨발로 울며 피신하는 다윗을 향해서 사울 가문에 속한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서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다윗의 부하들은 격분하여 저 놈의 목을 잘라 오겠습니다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냥 두라고 합니다. 그는 시므이의 저주가 여호와께서 다윗 자신을 저주하라고 시키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기는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 까닭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란다고 애절한 갈망을 표현합니다. 이것이 온유함에 도달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통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1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마땅한 자라는 사실을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죄악됨과 더러움을 회개하며 울며 애통한 결과 시므이의 저주의 말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유함입니다. 단순히 착한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라는 것이 느껴지시나요?

 

4. 그러므로, 어쩌면 팔복의 온유함이란 성격이 온순해졌다는 뜻보다는 복수의 칼을 빼앗긴 자들의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이 원리를 가장 잘 표현해 주신 주님의 비유가 용서의 교훈인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18:21-35>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씀은 천국백성에게는 동료의 멱살을 잡을만한 복수심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일곱 번만이 아니고 하염없이 용서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용서를 하나님께 먼저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하여 그의 멱살을 잡는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증거, 즉 구원받은 증거는 내 성품 속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증거가 불분명한 거죠.

 

우리가 온유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건, 우리의 성질이 남들보다 유난히 사납기 때문이 아니고 자신이 받은 용서의 크기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지적이십니다. 아무리 성질이 사납고 더러운 사람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떤 용서와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진짜로 알게 된다면 이웃을 정죄하고 보복할 수 없게 된다는 주장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값으로 환산되지 않는 천문학적인 일만 달란트의 용서를 이미 받아 놓고도 마치 우리가 당연히 받을 것을 받은 사람들인 것처럼 행세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뜻입니다.

 

<누가복음7:36-50>에도 같은 주제의 말씀 나옵니다. 온유함이란 성질이 온순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죄인됨과 용서받은 은혜에 대한 깨달음 때문에 자존심까지도 다 내려놓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누가복음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우리는 누군가 내 자존심에 조금만 상처를 내도 이를 갈며 분노에 떱니다. 온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죄인인 여자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 여자는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는 창녀였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침을 뱉어도 묵묵할 수밖에 없는 자타가 공인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우리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용서의 복음을 만났고 그 용서의 크기를 진심으로 깨달아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리의 여자들에게 자존심이 없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더 예민하게 자존심을 세웁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존심은 사라지고 예수님께 대한 감격만 가득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 여자와 같은 깨어진 심령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것이 온유함의 관건인 것입니다. 과연 사람들이 나를 벌레 대하듯 멸시한다고 해도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묵묵히 하나님의 용서에 감사할 수 있는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이란 천성이 착한 것도 아니고, 결심하고 도를 닦아서 성질이 안 나는 도덕군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질이 나고 섭섭하고 분해서 부들부들 치를 떨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신 용서의 크기를 알기 때문에 복수의 칼을 집어들 것은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여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5. 온유한 자에게 선포되는 복의 내용도 얼핏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에게 약속되는 것이 왜 하필 땅을 차지하는 것일까? 온유하면 땅 부자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뜻인가?

 

성경에서 땅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분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특히나 더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뜻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투자를 할만한 가장 안전한 재산을 떠올리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바로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차지한다는 말은 신약의 표현으로 환원하면 천국을 소유한다는 뜻이 됩니다.

 

, 팔복에서 설명하는 앞부분의 내용이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서 나타나는 성품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면 뒷 부분의 복의 내용은 전부가 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는 말의 반복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배부를 것이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클 것이다.

 

이 모두가 다 천국에서 받을 위로와 보상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온유함에 도달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분명하다는 도장찍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이 온유함의 특징을 뚜렷이 나타내시겠습니까? 주님은 이 특징이 나타나지 않으면 천국백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디 이 말씀 그대로 온유함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온유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내 자신의 죄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깊이 아는 것입니다. 내 결심으로 성질을 죽이려는 노력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죄의 깊이와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은혜를 묵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말할 수 없이 큰 긍휼과 용서와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온유한 태도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온유함에 도달한 사람이 바로 천국의 백성입니다. 내 안에 그 증거가 정말 나타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시는 한 주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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