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팔복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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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애통하는 자
진주호 2019-10-08 추천 0 댓글 0 조회 313

마태복음5:1-12 --- 산상수훈 팔복2 애통하는 자

 

1. 산상수훈에 나오는 명령들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우리의 본래 마음으로는 지키지 못할 명령들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비로소 지키려고 시도라도 해보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의도에는 천국의 백성들은 바로 이 명령을 지켜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가짜라는 겁니다.

 

아주 좁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하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7:18-23>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천국을 바라보게 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예수님을 향해서 입술로 주여주여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진짜 천국의 자녀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천국의 자녀는 그 행하는 내용으로 자기를 증명한다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주의 이름을 불러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큰 권능을 행하는 사람조차도 그 자체로는 천국백성의 표시가 아니라고 합니다. 천국 백성의 표시는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하늘 백성들의 행동양식에 대해서 밝혀 두신 것이 산상수훈이라면 산상수훈의 교훈을 자신들의 실제적인 행동양식으로 삼지 않는 자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 자체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5:20-22>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완전하게)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산상수훈에 있는 명령들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행하려고 시도하고 그 의에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행위의 증거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바보라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내용을 다른 말로 하면 천국백성은 지 성질 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그러셨습니다. 마음에 품는 생각과 입술의 말 한 마디도 삼가며 하나님의 눈치를 살펴 행하는 우리가 겉으로 꾸며서 모양만 내는 바리새인들보다 못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명하신 원리대로 실제로 살아보려고 정직하게 부담을 느끼며 실제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이 천국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려고 하지 않고, 이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서두가 되는 팔복의 말씀은 이런 삶을 살게 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 팔복의 첫번째 내용은 거듭난 천국의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못 견디는 하나님 결핍증을 실제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영적인 감각이 살아난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심령의 가난함은 돈이 없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돈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매사에 돈돈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해보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하고 살았던 부자 중에서도 심령의 가난함을 절실하게 나타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고백하는 것이 가난한 심령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전도서2:1; 8-11> 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8> (나 솔로몬은)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다 누려보았다는 것은 육신적으로는 부유함의 극치이지만 그 어떤 일을 해보아도 그 마음에 공허함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었다는 그 심정은 심령의 가난함인 것입니다. 전도서를 쓰는 솔로몬의 결론은 자신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와 그분과 연합하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도 하나님과의 진실한 소통과 사랑을 맛보지 못하면 결코 허기와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온갖 야망과 쾌락을 따라 살아본 어거스틴도 고백록에서 그 고백을 합니다. “오 하나님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나의 인생에는 진정한 휴식이란 없었습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의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이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하고의 실제적인 교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증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돈이 궁하지 않고, 신경 쓰이는 일들도 별로 없고, 여행 다니고, 쇼핑하고, 영화보고, 수많은 소일거리들로 자아를 부풀리며 분주하게 사는 생활이 그냥 만족스러운 사람이라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아닌 겁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는 하루를 못 견뎌 합니다. 온갖 자아실현의 프로그램으로 하루를 꽉 채워 살아도 공허감에 견디지 못하는 영적인 허기와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증상인 것입니다.

 

하다못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애감정에만 빠져도 그렇게 되잖아요? 저는 유행가 중에서도 주님께 드리고 싶은 가장 은혜로운 고백을 떠올릴 때가 있습니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 없는 내 마음여기까지 부르면 딱 복음성가입니다. 앉으나 서나 주님 생각에 사로잡히시고, 그분과의 연합과 그분과의 동행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수준의 심령이 가난한 자들로, 분명하게 표시가 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거듭난 사람의 두 번째 표시는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팔복에서 말하는 애통하는 사람은 무슨 슬픈 일이 일어나서 애통하고 절통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라면 애통하는 것이 무슨 복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서 애통하고, 사업이 망해서 애통하고, 시험에 떨어져서 애통하고... 딱 들어도 이런 건 아니죠? 그런 애통이 무슨 복이겠습니까? 그냥 슬픈 것이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함은 거듭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으로서의 애통함입니다. 그 애통함은 첫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것과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데 하나님과의 연합을 누리는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아서 안타까워하며 울게 되는 것이 팔복의 애통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교제를 이루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니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아가 왕노릇하고 있는 끔찍한 죄악의 실상을 발견하면서 울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의 애통함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을 통해서 묘사해 놓은 거듭난 사람들의 내면의 풍경이 바로 그 애통함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로마서7:18-19; 24>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만 내 육신의 안목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쉽게 만날 수 없고, 그래서 견딜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 마음, 그 울부짖음이 곧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시편42:1-3>에서 무명의 고라 자손 레위인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시편42:1-3>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는 예배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그런 현실을 못 견뎌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런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애통함은 다윗에게서 발견됩니다. 그는 자신 속에서 흘러나온 죄악의 사악함에 대해서 하나님의 뼈를 깎는 징계를 당하면서 통곡에 통곡을 아룁니다.

 

<시편6:1-2; 6> 1>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림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천국백성의 특징이 애통하는 자들이라는 뜻은 자신들의 죄악의 깊이에 놀라고 경악하여 통곡하며 무너진 마음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범죄한 이후에 애통하는 눈물의 기도를 경험한 이후로 예배의 자리는 그저 제물을 들고 와서 그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회의 시로 표현되는 51편에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시편51:16-17>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구약의 제사 제도를 세우시면서 번제와 속죄의 제물을 준비하게 하실 때, 그 제물 자체가 평온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속죄의 제물이라는 것이 가장 정결한 짐승을 골라서 성전으로 가져옵니다. 제단 앞에서 예배자가 그 제물에게 안수를 합니다. 내 죄의 모든 저주의 몫을 네게 전가하노라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목을 땁니다. 피를 흘리며 버둥거리고 죽어가는 그 제물을 보면서 히히덕거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피 흘려 죽어간 속죄의 어린양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 그 희생양에게 대한 미안함과 죄의 자각 때문에 상하고 통곡하는 심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심각한 간음죄 이후에 양심에 실제적인 고통을 느끼면서 통곡해 본 연후에야 그 진리를 깨닫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제물이 아니라, 내 상한 심령이었구나! 죄를 깨닫고 엎드려서 아파하고 통곡하는 내 눈물을 받으시겠다는 거였구나! 그런 뜻입니다.

 

4. 이 애통하는 눈물을 흘려 본 사람들은 삶의 태도가 구체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이 회개와 애통과 관련하여 다윗의 인생을 성경에서 읽을 때 얼핏 보면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구절을 성경의 기록자가 매우 인상 깊게 기록해 놓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열왕기상1: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열왕기상1:1-4>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왕이 이불을 덮어도 몸이 따뜻하지 않아 신하들이 어린 소녀를 데려다가 품고 주무시라고 왕의 침전에서 수종들게 합니다. 그러나 노쇠한 다윗은 그 처녀에게 결코 동침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연세가 그렇게 드셨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점잖은 표현은 아닙니다만 남자는 수저들 힘만 있고,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열 여자 마다하지 않는다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세종 대왕님이나 영국의 헨리 8세와 같은 강력한 군주들의 전기를 한 번 읽어보시면 다윗의 이 태도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금방 알게 됩니다.

다윗의 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훈련받고 다듬어진 모습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윗이 따뜻한 동녀의 몸을 품고 자기를 거절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과 욕망에 대한 애통한 눈물을 일평생 흘린 사람이기 때문에 나타낼 수 있는 정결한 품성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자신들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지고지순한 거룩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 본 사람들은 마음 속 탐심까지도 경계하며 자신들을 다듬습니다. 역시 다윗의 시입니다.

 

<시편19:8-11>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자신의 죄악의 실체를 발견하고 애통하며 몸부림쳐 보았던 다윗은 그 이후의 삶을 이렇게 정결함으로 자신의 마음의 묵상과 입술의 말 하나까지도 다듬으려고 노력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 모두 자신들을 점검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애통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만한 큰 잘못은 저지른 적이 없다는 알량한 자기 의에 도취되어서 그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나 있는 것처럼 안일한 마음으로 사십니까? 하나님의 성도는 기본적인 이 경건한 슬픔이 항상 생각과 태도에 배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슬픔은 자기 파괴적인 병리적인 슬픔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는 고상한 슬픔입니다.

 

5. 오늘 본문인 팔복의 말씀에는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안에 정결함이 없습니다. 내 안에 거룩함이 없습니다. 내 안에 순결한 사랑도 없습니다. 나는 오직 자아의 욕망으로 충만하며, 이기적이고 완고하고 지극히 교만합니다. 오 하나님, 냄새나는 내 실체와 이 추악한 몰골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렇게 애통하며 울고 엎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울지 마라 내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아 너의 허물과 죄를 영원히 사했노라.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령님이 네 안에 거하시며 너를 지극히 거룩한 자로 완성해 갈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선한 싸움을 계속하라

 

<로마서8:1-4> 말씀이 그뜻입니다.

 

<로마서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가 우리의 모자람과 불순함을 부끄러워하면서 애통해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위로는 단순히 용서받았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셔서 지극히 거룩한 존재로 완성해 가실 것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로마서8:3-4>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이 그 뜻입니다. 단순히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대!” 그러고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거룩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자신의 교만과 시기심, 게으름과 다툼과 비방과 분쟁, 악독과 악의를 진정으로 부끄러워하고 아파하면서 애통해 하는 사람에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품성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율법을 아는 것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거룩을, 용서받은 감격과 여전히 죄의 흔적을 지닌 자신을 애통해 하는 사람은 이루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위로도 이 확신만한 위로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감격에 감격을 더하며 흥분에 흥분을 더하여 로마서 8장을 터질 듯한 심정으로 고조시켜 고백해 나갑니다.

 

<로마서8:31-37>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이 한 구절 속에는 이런 위대한 약속들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 위로가 충만하고 이 신령한 기쁨이 끝이 없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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