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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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3:6-13 --- 만물보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
진주호 2015-02-27 추천 1 댓글 0 조회 1356

 

 

지난 시간에는 죄의 본질이 교만과 거짓말에 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세우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했던 마귀가 인간에게도 자기와 동일한 타락의 자유를 가지라고 충동질 하던 장면을 함께 보았습니다. 지금도 인류의 역사와 문화 곳곳에 하나님인 체하고, 하나님 노릇을 하며, 거짓된 사상과 거짓된 환상을 심는 마귀의 활동에 대해서도 경고하였습니다. 죄의 실체란 추악하게 보이는 윤리적인 범죄들 이전에, 마귀나 악한 영들 그리고 인간 내면에 있는 그 교만이 가장 사악한 뿌리라는 걸 밝혔습니다. 자식이 머리가 딸려 공부를 좀 못하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부모에게 눈 똑바로 뜨고 덤비는 건 패륜인 것입니다. 교만이 죄 중에 제일 흉악한 이유는 자기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에 사로잡히게 하는 욕망들>

 

오늘은 하나님과 같아지라는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바라본 여자의 눈에 그 금단의 열매가 어떻게 보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6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는 하나님 없는 교만에서 출발하는 유혹의 양상들이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이 만족을 얻고 싶어 하는 모든 욕망에 대한 총체적인 표현들입니다. 먹음직하다는 말은 육체에 속한 갈증과 허기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먹음직스럽다'는 이 말이 우리에게 얼마나 달콤하고 기대감을 주는 말인지 모릅니다. TV에서 전국에 있는 맛집들을 소개하는 프로가 방영되면 그 지방 최고의 요리들을 푸짐하게 차려 놓고 리포터들이 맛있게 먹습니다. 그렇게 침이 꿀꺽 넘어가도록 만들어 놓고서, 뭐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는 둥,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돈다는 둥, 아삭아삭 한 것이 시원하고 감칠맛 난다는 둥' 표현들도 기가 막히게들 합니다. 배가 고플 때 그런 장면들을 보고 그런 말을 들으면 말 그대로 정말 '먹음직스럽습니다.'

 

이 말은 먹는 욕망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육체가 생명의 본능을 가지고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모든 쾌락의 내용이 담겨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육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존재들은 모두 이 '먹음직~한 유혹', 그걸 육신의 정욕이라고 부르는데요, 바로 그 육신의 정욕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이 욕망에 철저히 지배받으면서 한 평생을 보냅니다.

 

욕망의 두 번째 표현인 '보암직하다'는 말은 눈으로 봄으로써 즐기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일단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보고 즐기는 것을 찾게 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고 하죠. 일차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우리의 욕망은 이제 보암직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도달하고 싶은 진선미의 극치를 추구하는 것이 이 두 번째의 욕망입니다. 모든 그림과 노래와 춤과 공연들이 이 부분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문화라고 그럽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의 아름다움은 극도의 흥분과 감격을 느끼게 해줄만한 대단한 것들이 많습니다. 거기다가 마귀까지 가세해서 관능적이고 극단적인 영감까지 주입시켜 주면 형언할 수 없는 쾌락과 즐거움이 거기에 있어서 영혼들을 옭아매고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원래 우리 인간에게 예술적인 재능을 주시고 진선미를 추구하게 하신 하나님은 그 모든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도록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 모두가 예배를 위해서 주신 아름다운 재능들입니다. 그러나 죄가 사람의 마음을 잠식해 버리자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이 없는 극치의 체험을 찾기 시작합니다. 위험한 쾌락의 끝을 시험하는 일들이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라는 옷을 입고 얼마든지 판을 칩니다. 절제되지 않은 극단의 쾌락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만다는 것을 깨달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안목의 정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정욕이란 아름다움의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고 제 만족에 빠져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끝간 데 없는 정욕으로 추구하기 보다는,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절제와 균형속에 적당하게 누릴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욕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랑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권세를 가지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천상의 지혜와 권력을 가져다 줄 것만 같은 탐스러움이 거기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신적인 자리에 세워진 것 같은,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종교적인 탐욕까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 수많은 거짓선지자와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 욕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굳이 이단의 교주들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인간들에게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은 종교적인 탐욕들이 누구에게나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선악과가 상징하고 나타내던 죄의 내용들입니다.

 

<내 던져버린 거룩한 의>

 

우리는 선악과라는 것을 '네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잊지마라'는 경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놓치고 바라보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 욕망들이 너를 지배하고 망칠 것이다' 이렇게 경고해 주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귀는 하나님 없이 그런 것들을 맘껏 맛보고 누려도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도 짜릿하고 황홀해서 너를 무한히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바람을 넣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라본 순간 이미 하와의 마음에는 그 욕망들이 풍선처럼 부풀어서 주체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패한 인간과 하나님의 고통>

 

그런데 하나님이라고 하는 울타리를 제거하고 나면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최고의 행복이 될 줄로만 알았던 그 순간이 가장 비참한 고통의 현실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망가지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절대적인 자유를 바라고 그 어느 누구의 간섭도 지배도 받지 않는 최상의 행복을 찾아서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그들에게 찾아 온 것은 자유와 행복이 아닌 극심한 수치심과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은 그 비극을 간략한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 말은 에덴 동산에서 영화로운 존재로 태어났을 때에 서로를 마주보며 행복하기만 했던 그 때의 상황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2:25)에는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꺼릴 것도 감출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자유와 기쁨과 충만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난 지금,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난 즉시, 그들은 스스로의 존재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도무지 그냥 서 있을 수조차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뭇잎을 가지고 자기들의 몸을 가림으로써 수치심을 제거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벗은 몸을 부끄러워합니다. 별스러운 자연주의자들 중에는 나체족들도 있어서 간혹 유럽의 어떤 해변에 가면 옷을 홀랑 벗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마는 그 사람들도 인간 내면에 생긴 이 깊은 수치심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미의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오지에 사는 원주민들이 다 벗고 사는 것 같아도 그 사람들도 가릴 건 어떻게 해서라도 가립니다. 인간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비극은 하나님께 대한 관계가 비틀어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마치 식물이 태양빛을 즐거워하듯이, 어린 아기가 엄마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자 그들은 하나님이 몹시도 두려워지고 싫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제 심판의 공포가 밀려와서 피하여 숨을 수밖에 없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비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를 지으시고 자기를 돌보시는 이를 온 힘을 다해 증오하는 자들이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수치스럽고 기가 막힐 질병에 걸려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사실 창세기의 이 장면이 편안한 이야기 스타일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인간에게 다가 오실 때, 인간들만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느낌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분노와 슬픔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찬란한 빛에 거하시고 죄악을 참아보지 못하시는 순결한 영이십니다. 그 눈에 죄로 부패해져버린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걸 참고 다가와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온갖 더럽고 역겹고 혐오스러운 장면을 다 합친 것보다, 썩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감정에는, 더욱 극심한 혐오감이 솟구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게 제일 역겨우십니까? (죄송하지만 굳이 묘사를 하겠습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꼬물거리는 구더기, 물에 젖어서 죽어 있는 쥐, 바퀴벌레, 저는 세상에서 제일 구토가 나올만큼 역겨운 것이 하수구를 뜯었을 때 나오는 시커먼 부산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카락에 가래에 음식찌꺼기에... 그런 걸 손으로 주물럭거야 한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그것보다 더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이 죄인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분노의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하나님의 감정이 많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우상)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22)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음부 깊은 곳까지 사르며 땅의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붙게 하는도다 23)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화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 (신명기32:21-23)"

 

가장 아름답게 창조해서 모든 좋은 것들을 선물로 주고 극진한 사랑으로 대해주었더니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 되어서 동산 수풀 가운데 도사리고 숨어가지고, 눈만 뺀질거리고 있는 겁니다. 노여움이 불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참고 다가와 주십니다. 성경에 그 장면이 담담한 어조로 묘사되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속까지 고요한 것이 아님을 눈치 채셔야 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 주체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느끼시면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모세의 오경을 보다 깊은 안목으로 읽고 하나님의 격렬한 감정까지도 느낄 수 있게 해준 해석자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서 42장에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구절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서42:1-4;6-7)"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의 긍휼히 여기는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내시겠다고 선언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에게 몸을 망친 채 사슬에 묶여 있는 우리를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감정이 격해지십니다.

 

"13)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14) 내가 오랫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이사야서42:13-14)"

 

이를테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한 남자가 되어서 연인인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딴 놈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 놈에게로 갔다가 이용만 당하고,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몽롱해진 채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고시는 기가 막히셔서 사랑과 울분이 뒤섞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으아아~' 하고 외치며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사랑하는 여인을 유린한 그 원수 놈을 때려부수겠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 전사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내가 오랫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더 참담한 것은 정작 자기를 구하러온 하나님을 그 백성은 알아보지도 못하고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그 처참한 몰골이 되어서도 자기를 유린한 원수 놈을 더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그런 장면을 묘사하시면서 하나님의 슬픈 울부짖음은 계속됩니다.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백성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내의 택한 사람보다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백성같이 소경이겠느냐 20) (이스라엘아)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21)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22)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이사야서42:18-22)"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시며 울부짖는 탄식의 소리를 발하시고 그 눈에는 눈물이 고여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일평생을 이렇게 가슴이 타들어가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도 우리의 마음은 돌처럼 차갑기만 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남은 평생을 울며 회개해도 모자랄 황송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본문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감정에 대한 표현들은 꿀꺽 삼키고 담담한 어조로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해 나가지만 그 속에 표현되어 있는 기가 막힌 상황들은 성경 전체에서 항상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오셔서 아담과 하와의 죄악의 실상을 밝히시고자 질문을 던지십니다. 먼저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러자 아담이 더 이상 숨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두려워해서, 피하고 숨게 된, 부패한 죄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닙니다. 회개와 자복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면서 책임을 통감하는 말을 하기보다, 파렴치하게도 그 죄를 회피하는 말을 뱉어내고 맙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주어서 내가 먹었나이다" 그랬습니다. 죄가 들어간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간에도, 의리도 책임감도 사랑도 다 물 건너 가버린 이기적이고 뻔뻔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읊어대던 그 입술로 '저 여자 때문입니다' 그러고 있는 겁니다. 거기다 덧붙여서 '하나님께서 주신 저 여자가!' 하고 말함으로써 책임을 하나님께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랑 똑같죠.. 뭘 하다 조금만 잘 안되면 운명 탓 조상 탓 하나님 탓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게 인간들입니다. (잠언19:3)에는 이런 인간의 성품을 두고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는)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하고 꼬집고 있습니다.

 

하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고 물으시니까 "뱀이 꼬셔서 그랬습니다" 하고 핑계를 댔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더 이상 영광스럽고 존귀한 창조의 면류관이 아니고 부패하고 냄새나는 죄악의 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는 슬픈 증거인 것입니다.

 

<부패함의 정도>

 

훗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해서 굴러 떨어져 버린 죄의 자리, 그 부패함의 정도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은 온 우주를 통틀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17: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라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 내면에 대한 송구스러운 묘사를 자주 하셨습니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7:18-23)"

 

인간의 내면은 하나님의 눈으로 들여다보시기에 역겹고 더러운 것이 온 우주에서 단연 으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죄송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친히 찾아 오셔서 그들을 그 비참함에서 건져내시고자 아들을 보내실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할 말이 없는 족속들인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되찾은 거룩함의 기회>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볼 주제이긴 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찾아오실 뿐만이 아니라, 죄인들을 그 비참한 형편에서 건져내실 구원의 계획도 동시에 발표하십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볼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하시는 약속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 아래 팔려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유혹들을 좋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아무도 그 유혹을 피해갈 수도 없었고, 이겨낼 수도 없었습니다. 백번 싸우면 백번 지게 되어 있는 무기력하고 비참한 죄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아니 싸우려고 하는 의지조차 없이 오히려 죄를 더 좋아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기력함과 그 불가능함을 아시고 영원하신 독생자를 보내셔서 아담이 실패했던 그 일을 완전히 이루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죄인을 대표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 40일간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입니다. 왜 죄가 없으신 순결하신 주님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셔야 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린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이루신 의의 옷을 입혀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그 일을 승리하심으로써 완전한 의를 마련하십니다. 마태와 누가가 둘 다 이 기록을 전하는데 신기하게도 창세기의 유혹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특히 누가는 그 순서까지도 동일하게 묘사합니다.

 

첫 번째는 '먹음직한' 육신의 정욕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먹어야 살고, 먹는 게 만족이니까 돌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시험했습니다.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는 복종과 사랑을 끊어버리고 네 능력과 네 힘으로 먹을 것을 확보하고 목숨을 보존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음식으로 부지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는 분명한 고백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보암직한'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고, 자기에게 절하면 그것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아무리 영화롭고 아름다운 천하만국의 영광으로 유혹해도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하는 인간의 본분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셨습니다.

 

세번째는 성전 꼭대기에 세우더니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지혜롭게 행하여 기적을 일으키고 온 세상의 주목을 받아서, 그리스도로서 네 자신이 하려는 일을 쉽게 성취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말로 그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아담이 실패했던 그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의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루신 그 의를, 택하신 우리에게 주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태어날 때부터 더럽혀지고 부패해진 우리들일지라도 예수님과의 연합을 이루면 누구든지 다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부패하여 비참해졌을지라도 주께서 정답을 쓰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의를 내 것으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매번 선악과 명령을 새롭게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비록 실패했지만 우리는 매일 긍휼히 여기심을 받으면서 다시금 이 거룩한 싸움을 감당하라고 격려받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자주 실패해도 주님께서 주신 의의 옷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한,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리고 매일 한 걸음이라도, 죄를 이기고 거룩해지는 이 일에 진전을 이루고자 힘껏 싸우셔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2:15-17)에는 그 싸움이 이렇게 명령되어 있습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2:15-17)"

 

창세기의 본문에서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욕망'으로 묘사된 것들이 여기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힘쓰고, 주님을 닮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에는 맥없이 그런 욕망에 끌려 다니기만 하던 존재였다면 이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그분이 공급하시는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싸울 의욕만 가진다면 이제는 반드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죄와 싸우기 위해서 더욱 용기를 내시고, 분발하고 싸우셔서 거룩한 열매들을 맺으시며, 영원히 거할 하늘의 소망을 매일 새롭게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인생이라고 하는 기회의 시간을 허락해 두신 것입니다. 부디 단 한번 뿐인 인생을 다른 헛된 것들로 낭비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먹고 입고 즐거움을 누리는 모든 일들은 장차 천국에서 영원토록 가장 풍요로운 공급을 받으며 얼마든지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꾸시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불과 백년간의 인생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탕진해 버리고 나면 하나님과 철저히 단절되서 모든 은혜로운 공급이 다 중단된 채로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을 하늘에 속한 일들에 온전히 쏟아부으면 그 일을 하는 중에도 매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고, 땅에서 누리지 못했던 일들은 천국 버전으로 더 풍성하게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가장 힘을 기울이고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할 일은 그 영원한 삶을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일 뿐입니다. 부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에 힘을 다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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