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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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3:1-5 --- 유혹의 내용인 '교만'
진주호 2015-02-20 추천 0 댓글 0 조회 851

 

 

지난 시간에는 마귀가 존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완전한 천사가 자기의 영광에 도취되어서 하나님과 맞먹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품다가 스스로 타락해버린 존재, 그게 마귀라고 했습니다.

 

<자뻑 천사>

 

한때, 젊은이들이 잘 쓰는 말 중에서 '자뻑'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 점잖은 표현은 아닌데 많이들 썼었습니다. 더 옛날에는 '뿅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세월이 더 지나니까 조금 더 어감을 격하게 만들어서 '뻑간다' 하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뿅 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황홀경에 사로잡힌다' 또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다' 그런 걸 두고 '뻑 간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말장난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의 외모나 재능에 대해서 스스로 도취되거나, 엄청 만족스러워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언제부턴가 '자뻑'이란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귀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자뻑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도취되어서 정신이 나간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대장급 천사에게 얼마나 큰 능력과 영화로움을 주셨는지 그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차이가 뭔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대단한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사는 죽지도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같이 전지전능하거나 무소부재하지는 못하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들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운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심오한 지혜로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도 합니다. 마음먹은 일들을 성취시킬 수 있는 큰 능력도 가졌습니다. 다른 많은 천사들이 자기에게 복종을 할 만큼 큰 권세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가 하나님보다 못한 게 없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고 결심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타락해버린 천사에게 '네 마음이 스스로 하나님인 체할지라도 너는 피조물이요 신이 아니다' 라고 꾸짖으십니다. 설령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과 거의 맞먹을 만큼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 천사는 스스로가 피조물일 뿐임을 자각하고 겸손했어야 합니다. 나뭇가지는 아무리 굵어도 줄기에 붙어서 뿌리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영화로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잎사귀도 생기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매달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이 영화롭고, 능력 있고, 존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창조주께 전심으로 붙어 있을 때에만 그렇습니다. 마귀는 그 금지의 선을 넘었을 때부터 모든 선한 빛을 잃어버리고 말할 수 없이 추악한 존재로 전락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독버섯>

 

마귀가 이렇게 추악한 어두움의 존재로 전락했다는 말은 그 본질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지 그가 표현하는 말이나 행위가 표면적으로 험상궂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놈은 쫓겨나 결박당하긴 했어도 여전히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고, 지극히 세련된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위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귀를 연상할 때 언제나 흉측한 모습으로만 상상을 하곤 합니다. 이건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마귀의 본질은 추하게 일그러진 형상이나, 독한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께 거역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만한 마음과 정신에 그 본질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그가 인간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유혹하거나 속일 때에는 추한 모습으로 다가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냉철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가장 친근한 모습으로, 광명한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흉측한 모습으로 달려들면 누구나 다 경계하고 조심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다정하고 우정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감쪽같이 속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년 첫 주일 설교에서 영적전쟁에 대해서 선포할 때 성경에서 마귀의 간교한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준 장면 중에 하나가 베드로가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놀아나는 장면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멋진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이 올바른 고백을 진심으로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놀라운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핵심적인 비밀인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주께서 죽으신다는 소리에 울컥하면서 자신의 열정을 다해서 한 마디 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자기가 보고만 있지 않겠다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님을 안전하게 지켜드리겠다고, 충성스럽고 정에 넘치는 말로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수님은 노발대발 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사단아!' 하고 부르시면서 무섭게 책망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마태복음16:23)"

 

인간적인 사랑과 정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베드로의 말 속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좌절시키고자 하는 마귀의 간교한 속임수가 틈타고 들어왔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생각과 태도를 향해서 '사단아!'하고 외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스스로는 인간적인 의리라고 굳게 믿고서 한 그 말이 사실은 마귀에게 속아서 주를 넘어뜨리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결코 흉측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우정을 가장한, 옳고 정당하고 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비위를 맞춰주며 교만을 부추기는 영>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결코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그 놈은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너희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로 꼬드깁니다. 마귀가 가지고 다가온 전략은 치밀하고도 간교했습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마치 하나님이 심술궂고 인색한 폭군인 것처럼 말하여 이간질을 시도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적이 없으시죠? '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 임의대로 먹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을 깎아내리고 하나님을 왜곡시키고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가 멀어지도록 술수를 부린 것입니다. 뱀을 통한 마귀의 말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와는 아담을 통해서 배운 진리에 대해서 그 요점은 그다지 벗어나지 않고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먹지 말라'는 단순한 명령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보탰고, '정녕 죽으리라' 하신 지엄한 명령에는 '죽을까 하노라'는 말로 살짝 물을 탔습니다. 계시를 직접 전달받은 아담에게서 하와에게로 전달되는 과정에 아주 바늘 끝만한 틈새가 벌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마귀는 그 틈새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건 하나님이 너희를 노예로 얽어매두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고 속삭입니다. 그걸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하고 같아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게 싫어서 못하게 한 거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인류에게 심어놓은 죄의 본질입니다. 사람들은 죄라고 하면 추악한 범죄들을 먼저 떠올립니다마는, 그러나 마귀가 심어놓은 악의 본질은 이 교만한 정신, 거역하는 마음,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통치를 거부하려는 불복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기준을 하나님 없이 너희가 너희 생각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는 속살거림이 악의 본질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행세>

 

그렇기 때문에 마귀에게 사로잡힌다고 해서 무조건 다 짐승처럼 흉폭한 범죄자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악은 외양으로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간교한 속임에 끌려든 사람들 중에는 너무나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상과 인품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극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 사상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만의 악이 가득 들어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힌두교의 배경에서 태어나서 참선 수도를 하는 중에 스스로 깨우치고 해탈해서 부처가 되었다고, 인간과 신을 뛰어넘는 절대 자유자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기를 따라서 해탈하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을 뛰어넘어서 하나님 보다 더 자유로운 부처라는 존재가 되라고 부추긴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현자들은 결국 마귀의 지혜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했던 말과 태도 그대로의 가르침이 반복될 뿐인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사상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가장 큰 특징이 자신이 하나님 행세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히말라야산 기슭에 있는 카필라성의 왕자로 태어나서 만물과 인류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석가모니가 들판을 산책하다가 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농부의 연장에 찍혀서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로 몸부림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참새가 날아들어서, 그 벌레를 쪼아 물고 공중으로 날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솔개가 달려들어서 그 참새를 덮쳐서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석가모니는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의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째서 생명 있는 것들은 서로를 학대하고 잡아먹어야 하는 것일까?, 이 끝없는 고통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고 깊이 고뇌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열여섯 살에 결혼을 해서 아들까지 두었습니다. 그러나 왕자로서의 아주 유복한 생활을 하면서도 언제나 삶의 허무함과 고통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살고 있는 성의 동, 서, 남, 북의 네 문으로 나가서 차례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 수도승 등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인생의 괴로움과 죽음에 대해 답을 찾겠다고 스물 아홉 살에 집을 나와서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제 스스로 도를 깨달으려고 하는 자들의 영혼을 마귀가 그냥 둘리가 없습니다. 마귀는 그에게 다가가서 심오해 보이는 사상을 주입시켜 주고, 그 스스로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황홀한 체험들도 주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마귀는 자기의 하수인에게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 수 있도록 기사와 표적을 행할 힘도 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별별 심오한 체험을 다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마귀입니다. 이럴 때 인간은 속수무책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본질적인 자신의 사악한 기운인 교만을 불어 넣습니다. 이 교만은 인간들끼리 잘난척하는 그런 수준 낮은 교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잘 포장이 되어서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온유하고 자비롭고 고매한 성품으로만 보이는 그런 교만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만물을 뛰어넘어서 절대적인 자유자가 되고, 하나님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는 치명적이고 근원적인 교만입니다. 석가모니는 스스로 해탈했다고 믿고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하나님을 흉내를 내기 시작합니다. 자기는 모든 고통스러운 생존을 뛰어넘은 부처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윤회의 수레바퀴 아래 끝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억조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고 대자대비한 불법을 설파해서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내겠다고 합니다. 고상한 하나님 놀음입니다. 그 매혹적인 이론 뒤에는 마귀의 미소가 있습니다. 인류는 아주 절묘하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결코 인간에게 자기의 종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가 최고가 되어라', '하나님의 간섭을 벗고,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되어 무엇이든 네 마음대로 하는 존재가 되라'고 부추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기의 종노릇을 하게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게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합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TV프로그램에서 종종 등장하는 귀신현상이나 최면술사들이 벌이는 전생체험 같은 것들을 조종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무당들은 '초혼의식'이라는 걸 곧잘 합니다. 억울하게 죽어 원혼이 되어 떠도는 귀신들을 불러 올려서 생시의 사람과 대면하게 해준다는 의식입니다. 이런 일은 세계 어느 나라든 무당이나 영매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벌어지는 흔한 현상입니다. 명창 이은관씨가 판소리로도 불러서 아마 나이드신 어른들은 들은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배뱅이 굿'이라고... '왔구나~ 배뱅이가 왔구나~' 그러면서 무당이 울면서 생전의 배뱅하고 똑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부모랑 죽은 사람만 알 수 있는 비밀 같은 것들을 주절주절 쏟아 놓습니다. 그러면 진짜 딸의 혼백이 왔다고 기절할 듯 끌어안고 울고 그럽니다. 그것은 진짜 죽은 자의 혼백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영적 세계에 대한 진리를 혼미케 하려고 마귀의 졸개들이 벌이는 한바탕 속임수인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와 가치관을 흐려놓기 위한 이것들의 거짓술책은 성령의 은사를 빙자하는 자리까지 치고 들어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신도림에는 성락교회라는 이단종파의 예배당이 있습니다. 어마어마 합니다. 목동을 향해서 노아의 방주모양으로 지었다는데 전면 유리가 세계지도를 표현한 네온사인입니다. 불을 켜 놓으면 아주 대단한 풍경이 됩니다. 소위 귀신론에 빠진 김기동이란 자가 세운 이단종파입니다. 이 사람이 은사를 받아서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는데 귀신하고 문답을 합니다. '넌 누구냐?' 그러면 귀신들은 종종 '나는 6.25때 죽은 아무개인데, 내 명을 다 못 채우고 죽은 게 너무 억울해서 이 사람에게 붙었다'는 둥 그런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 한심한 목사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로 무장하지 않고 귀신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것으로 교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며 귀신이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여지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산자의 땅으로 들락거리거나 떠돌아다니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귀는 속일 수 있으면 목사든 성도든 가리지 않고 다 속입니다.

 

작년에 EBS에서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한 작품들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티벳 라마교의 환생이론에 대한 실제 상황을 찍은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도를 닦은 고승들이 죽으면 반드시 그가 환생을 해서 어린 아이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이제 막 돌을 지난 아이들이 죽기 전 고승들이 사용하던 염주를 골라내기도 하고, 생전 보지도 못한 그들의 습관을 알아맞추기도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그들은 그런 신기한 일들로 환생을 검증한다고 합니다. 지금 티벳의 지도자로 있는 '달라이 라마'도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인물입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사이비 무당 같은 존재냐 하면 그렇지가 않고 전 세계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심오한 사상가로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실상은 다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없이 하고픈 교만>

 

이와 같이 성경이 지적하는 가장 사악한 죄의 뿌리는 '하나님을 없이 하려는 교만'입니다. 이러한 교만은 최초에 마귀에게서 나왔고, 그것이 인간에게도 주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흉악한 윤리적인 범죄들 이전에 모든 악이 시작된 그 처음 근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근원적인 이 교만이 별로 죄 같지도 않은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먼저 부패시키기 때문입니다.

 

"4)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며 6)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9)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시편10:4-9)"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의 마음이 죄의 씨주머니인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심으로 그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늦추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오만 방자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오래참아주시는 긍휼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평안과 형통을 누리는 그들은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리고 그 교만의 열매가 우리 눈에 뜨이는 범죄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입에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고,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으며,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외로운 자를 엿보고,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고 끌어 잡는다'고 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인간의 죄의 정체를 폭로할 때에는 언제나 이 사상, '하나님이 없다' 하는 정신을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회만 되면 읽어드리는 바울 사도의 로마서 1장의 본문도 바로 이 내용입니다.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로마서1:28-29)" 하고 길게 나열하는 것입니다.

 

모든 악이 솟구치는 최초의 근원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혹의 본질이요, 마귀를 닮은 죄의 교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악을 '살인이나 간음, 폭행과 사기' 등과 같은 표면적인 것만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죄의 뿌리는 하나님께 대한 교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와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자기고집이 더 근원적인 죄라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평소에는 죄라고 여기지도 못했던 자존심이 센 것조차도 깊이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고, 마귀의 교만을 가장 많이 닮은 부분도 바로 그 병든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심을 입은 우리들은 그 혈과 육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는 반응이 없어야 합니다. 밟아도 꿈틀하지 않아야 하고, 찔러도 벌떡 일어나지 못해야 죽은 자입니다. 마치 절인 배추처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나 사람들에게 대한 반응이, '필요하시다면 저를 잡아 잡수세요'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들에게 주께서는 하늘에 속한 복으로 가득 채워주시고, 천사도 부러워할만한 존귀한 지위로 올려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저기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도대체 우리보고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거 아냐? 자기는 그렇게 하나?” 그런 항변이 생기실 수 있습니다. 예 물론 저도 잘 안 됩니다. 하지만 그곳이 우리가 도달해야할 푯대라는 사실만큼은 한 순간도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방향으로 일평생 끊임없이 전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번 시도해서 백번을 실패를 해도 백 한 번째 또 일어나서 걸어가야 합니다. 잦은 실패로 너무 낙심이 돼서 주저앉았다면 그 쪽 방향으로 눈이라도 부릅뜨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이 그런 제안입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14:7-9)”

 

하나님 대신 자아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아숭배를 하던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아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살고자 하는 겸손한 피조물로 회복되자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깊은 흉계에서 벗어나 영광의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원칙입니다. 주님께서 영원하고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의 실패를 완벽하게 보상하시고, 마귀의 참소를 무력화 시켜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 길을 가기만 하면 됩니다. 포기하거나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수없는 실패를 반복하다가도 어느 순간 교만한 자아를 벗어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순종을 연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온유하고 겸손한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모습이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매일 힘써 그 선한 싸움을 감당하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진정 “밟혀도 꿈틀하지 않을 수 있는 자아가 죽은 지렁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길이며, 우리가 그분을 닮아가는 길이고,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는 길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매일 영적으로 깊어져 가는 심오한 재미를 예수님 안에서 한껏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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