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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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2:24-25 --- 거룩한 계시로서의 성(性)
진주호 2015-02-04 추천 0 댓글 0 조회 461

 

 

지난 시간에는 인간이 상호 개체 간에 하나로 연합되는 사랑의 원리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그 근본 원리인 성적인 부분을 조금 더 직설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주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 자신들에 대한 사용설명서인 성경 말씀을 참고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도대체 어디다 사용해야 할지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의 인생에 대한 관점을 세워 저마다 각양각색으로 살아들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으신 분의 의도와는 심하게 어긋나서 말도 안 되는 파행으로 스스로의 삶을 망치거나 남까지 파괴시키는 일들이 흔히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에 관련된 부패와 오용은 눈뜨고 보기 힘든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 상호간에 관계의 기초로서 주신 남녀 간의 성적인 연합이 과연 어떤 의도를 가졌었는지, 현재는 어느 부분이 오해되고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밝혀봄으로써, 성도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듬어 나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자 합니다.

 

<신랑이신 하나님과 신부로서의 교회>

 

하나님께서 성관계라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셨는지는 성경 말씀에 비교적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내와 남편이 부부생활을 하면서 한 몸으로 연합되는 원리를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원한 연합에 대입시켜 설명합니다.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에베소서5:28-32)”

 

사도 바울 말은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와 교회가 신비롭게 연합하는 일'의 설명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어느 날 사도 바울이 혼자서 기발하게 생각해 낸 것이 아니고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계시를 해 주신 내용을 신약의 관점에서 정리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러한 사상을 예언적인 메시지로 선포해 놓으셨습니다.

 

“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쀼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사야서62:1-5)”

 

또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는 당신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에게 장가들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호세아2:19-20)”

 

뿐만 아니라 에스겔서 16장이나 23장을 통해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책망하실 때, 이보다 더 적나라한 말이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성적인 묘사들을 통해서 배반당하신 남편으로서의 울분을 토로하십니다. (차마 여기서 읽어드릴 수 없을 만큼 성인버전입니다. 하나님은 체면을 차리시며 말을 에둘러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격정을 지니신 분이시고 솔직하시고 거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댁에들 가셔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파격적인 표현들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시대 이전에 아가서라고 하는 특별한 성경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는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자녀들에게 성인이 되기 전에는 읽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성적인 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이 책을 참된 부부간의 사랑을 그려 놓은 책으로 이해했고,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친밀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아가서에는 신랑과 신부가 서로의 존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칭송하면서 서로를 통해 온전한 기쁨을 누리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신부가 먼저 신랑에게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아가서1:2-4상)" 이 구절은 개역성경의 번역이 조금 미흡합니다. 무슨 말인지 내용이 잘 안 드러나지요? 신부가 신랑에게 하는 사랑의 말인데 신랑한테 ‘너’라고 그러면서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쉬운 번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나에게 입 맞춰주세요. 숨이 막힐 듯한 님의 입술로. 님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님에게서 풍기는 향긋한 내음, 사람들은 내 님을 쏟아 부은 향기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기에 아가씨들이 내 님을 흠모하지요. 나를 데려가세요, 나의 임금님. 나를 님의 침실로 데려가 주세요.”

 

신랑도 역시 신부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칭송하면서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6)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아가서4:1-7,11)”

 

사랑이 무르익어 갈수록 노래는 더욱 진하고 황홀해집니다.

 

“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5)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나를) 쾌락하게 하는구나 7)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8)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9)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아가서7:1-9)”

 

영화로 치자면 틀림없는 베드신에 해당하는 이 장면이 틀림없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서가 노래하는 성적인 사랑은 노골적이지만 천박하지 않고 관능적이지만 순결합니다. 하나님은 성을 결코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황홀하며 신비롭고 순결하며 찬란하기까지 한 아름다움으로 묘사됩니다. 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가장 완전한 남녀간의 사랑, 이상적인 성적인 연합을 묘사함으로써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인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신 성경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아내와 남편을 떠올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완전한 사랑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떠올리라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이, 이 아가서의 말씀에서 신랑이 신부의 전체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것과 꼭 같이 주님이 내 존재의 전부를 내 육체와 영혼의 구석구석을 사랑스럽게 여겨주시는 것을 느껴보라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인간의 성생활에는 이렇게 높고 거룩한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들이 성생활을 누릴 때에도 그 누리는 방식이 철저히 거룩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 행위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거룩한 계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거룩함을 잘못 이해하고 쾌락을 죄악시해서 부부의 성관계라도 자녀를 잉태하기 위한 최소한의 결합만이 거룩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가서를 통해서 보여주신 거룩한 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이란 점잔을 빼며 쾌락을 배제한 수동적인 결합을 하라는 뜻이 아니고, 결혼과 서로간의 신실한 언약이라고 하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만 그 선물을 누리는 것으로 거룩함을 나타내라고 요구하십니다. 부부의 침실 안에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성관계란 가장 황홀한 기쁨을 위한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이며, 그 감미로운 느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유추해도 될 만큼 거룩하기까지 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고상한 성의식>

 

성에 대한 바로 이러한 관점을 일컬어 저는 ‘거룩한 계시로서의 성’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성은 단순히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쾌락의 도구만이 아닙니다. 성은 자녀를 잉태하고 낳는 생물학적인 번식의 수단에서 그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이 장차 영원히 누리게 될 신비로운 연합의 순결한 친밀함과 다함이 없는 기쁨을 알게 해주려는 계시의 수단이라는 데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는 게 성경의 주장입니다.

 

한 때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 중에서 구성애 아줌마의 아우성이라는 강연이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모두가 수면 밑에서 고민만하고 무지한 채로 속앓이만 하던 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는 입담과 건전한 대안 제시로 잘 풀어주어서 전국민을 열광시켰던 강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건전하고 유익한 접근을 하는 구성애 씨의 강의도 아름다운 성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생명의 성’이 전부였습니다. 구성애씨는 성을 쾌락의 도구로 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빠져서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성이란 반드시 생명을 잉태하고 그것을 축복된 가운데 맞아들이기 위한 생명을 위한 성이어야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구성애 아줌마가 강력하게 주장한 건강한 성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윤리적인 제시로서 성이 과연 건전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희박합니다. 구성애씨를 비롯한 세상의 성교육은 무지함에서 오는 비극들을 막아보자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는 얼마든지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도 피임에 대한 상식을 교육을 시키는데다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성경은 혼전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되고, 결혼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성관계에 대해서 ‘반드시 죽여야 하는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경의 강조점들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세태의 윤리의식은 너무나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크리스찬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대부분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죄를 규정하는 내용에 있어서 성경의 생각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서구의 나라들은 순차적으로 간통죄를 폐지하고 있습니다. 성인 남녀가 서로의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법으로 정죄할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세상법정들의 입장인 것입니다. 법적인 관점뿐만이 아니고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드라마나 소설 등을 통해서 성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생각들은 ‘사랑하면 얼마든지 성관계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쌍방 간의 감정의 상태에 근거를 두지 않고 객관적으로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결혼관계 안에서만 성관계가 허용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미혼의 남녀가 혼전에 성관계를 했다면 그들은 이미 한 몸으로 묶인 것이기 때문에 평생에 버릴 수 없고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거룩한 약속을 깨고 위반하는 모든 성적인 행위에 대해서 성경은 ‘반드시 죽이라’고 명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강조하였습니다.

 

<회복될 수 있는 순결함>

 

물론 성경에 ‘이러 이러한 법을 어긴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는 율법은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을 모조리 색출해 내서 가차 없이 죽여버리라는 데 강조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합니다. 다윗은 간통과 살인으로, 이 반드시 죽이라는 경우에 가장 확실하게 해당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울며 통회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면을 약속하셨습니다. 장차 세상에 보내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언약 안에서 그의 허물을 사하셨고, 그의 죄악을 가려주셨습니다. 다만 다윗은 그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징계를 철저하게 받으면서 쓰라리고 혹독한 훈련들을 거침으로써 거룩함을 회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신약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남편을 여섯이나 바꾸면서 복잡한 인생을 살았던 사마리아 여자에게 인생의 목마름을 끝낼 수 있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가르치셨고, 생수의 근원이신 자신을 소개하심으로써 그녀에게 참된 기쁨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간통을 저지르는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절묘한 말씀으로 구해주시고는 ‘나도 너를 정죄치 않겠으니 가서 죄에서 벗어난 삶을 살라’고 보내주십니다. 예수님은 평소 세리와 창녀들과 같은 식탁에서 먹고 마시면서 격의 없이 대해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기꺼이 초대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창녀였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따르던 지도적인 여자들 그룹에까지 낄 수가 있었습니다. 망가진 인생, 더럽혀진 성이 얼마든지 다시 거룩함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복된 장면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인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신 사례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제는 복음 안에서 율법을 폐기처분하신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순된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강조하여 세우신 율법을 당신 스스로 허물어 버리실 리가 결코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폐기하는 대신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 ‘정녕 죽여야 한다’는 지엄한 형벌을 죄 없는 당신의 아들에게 대신 집행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법을 어기고 스스로를 더럽히는 모든 인간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서 솟구치는 무서운 분노를 그 아들에게 부어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실 법적인 근거를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을 대신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한 몸에 받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기꺼이 죽으실 것을 결심하셨기 때문에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공짜로 남발한 용서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다 참여하셔서 가장 비싼 댓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저주와 심판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죄와 불법에 대한 하나님의 지엄하신 심판의 기준은 한 순간도 포기되거나 적당히 타협된 적이 없습니다. 성에 대한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은 오직 혼인의 언약 안에서만 누리되 그 울타리를 벗어나서 저지르는 모든 범죄는 죽음으로 징계를 당할 죄악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변치 않을 기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법을 지키지 못하고 허술하게 여겨 범죄를 한다면 직접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지지는 않지만, 그 행위는 우리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능멸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자녀들일 수록 더욱 정신을 차려서 죄와 더불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버림을 받아 지옥에 갈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니고 내가 고의로 법을 어기고 범죄할 때마다 사랑하는 주님을 내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고 다시 죽이는 꼴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 때문에 죄를 멀리하고 더러운 습관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이 거룩한 관점을 올바로 세우지 못하고 허물과 실수로 더럽혀진 행적이 있었다면 과거의 죄책감에 얽매여 있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과거보다는 ‘지금부터 영원까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거룩한 생각에 동의하시고 이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거룩함 안에 거하겠다고 결심하신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순결한 신부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적 권면>

 

이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첫째, 성은 반드시 결혼이라는 언약 안에서만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하면 성관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랑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하나님께서는 그다지 신뢰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요동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혼의 약속은 당사자들끼리만 서로 좋아해서 맺는 시시한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좌정하신 자리에서 온 가족과 친지들이 엄숙한 증인이 되고 당사자들이 손을 들어 맹세하여 세우는 거룩한 언약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에게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부의 사랑을 통하여 신실함과 순결함을 잘 배우고 연습해서,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영원히 올려드리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둘째, 성은 반드시 섬김의 원리를 가지고 누려야 합니다. 상대방을 내 욕구충족의 대상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됩니다. 서로 간에 자발적으로 상대방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섬기는 종이 되라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7:3-5)”

 

상대방이 성의 충족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거절하지 말고 그를 충족시켜 주라는 것이 성경의 권고입니다. 부부가 서로 간에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상대방을 배려함으로써 성을 가지고도 섬기는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성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는 목숨이 걸린 엄중한 경고가 주어질 만큼 매우 중요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땅에서의 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성은 그 자체가 무슨 대단한 행복의 원천이나 되는 것처럼 과도하게 부풀려져서 추구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신랑이신 하나님과의 거룩하고 영원한 사랑을 알게 하려는 이 땅에서의 방편일 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아내와 남편에게 섬기는 사랑을 충고한 이후에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혼인하여 부부생활을 하라는 말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싱글로 살아가면서도 성욕에 지배받지 않고 성령께서 성경말씀에 계시해 주신 내용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누릴 수 있다면 싱글이라는 조건을 힘들어하지 말고 지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7:6-9)”

 

우리가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라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집중해야 할 대상은 오직 그분 뿐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의 같은 장 29절에서는 이렇게까지 당부를 합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린도전서7:29-31)”

 

이 땅에서 주어진 것들을 누리되 그것들이 내게 사라져도 내 행복이 전혀 흔들리거나 지장 받지 않을 만큼의 마음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되 그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모든 기쁨과 모든 행복과 만족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고 살아야 한다는 충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혼인 상태에 있는 분들은 서로에게 충실하며 사랑하고 섬기는 부부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을 배워가시기를 권면합니다. 또한 싱글 상태로 계신 분들은 잠시 이 땅에서 존재하는 그림자로서의 배우자가 아닌 영원한 만족의 실체이신 우리 주님께 온 마음을 집중하심으로써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는 영적 충만함을 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미혼상태에 있는 청년남녀들은 헛되게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빨리 빨리 양가 부모님들께 허락을 받아서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생활 안에서 훈련받을 생각들을 하십시오. 고르고 고른다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하며 지지고 볶고 아비와 어미가 되어 자식들 때문에 노심초사 해보는 것만큼 하나님을 깊이 알게 해주는 다른 교육이 없습니다. 빨리 빨리들 결혼하세요.

 

모쪼록 우리 모두, 저마다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해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고 모든 행복의 원천 모든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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