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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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2:20-25 --- 사랑의 원리 한 몸인 인류
진주호 2015-01-29 추천 0 댓글 0 조회 621

 

 

오늘은 에덴동산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일로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서의 하와를 지어주신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사랑의 연합체로 창조하심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우리에게 신비로운 방식으로 알려주십니다.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모든 것들은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려는 계시의 방편들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와 만물에다가 하나님 자신의 솜씨와 성품을 반영해 두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그것을 찾아내도록 하십니다. 인간들은 천지와 만물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신비를 찾아내어 그분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편19:1)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신약에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1:20)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조화로운 세상>

 

이러한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주와 만상을 관찰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와 만물은 뒤죽박죽된 혼돈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광대무변한 우주든 아주 작은 사물이든 놀랍도록 정교한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와 만물들에게서 이러한 질서와 조화를 발견하면서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품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의 집에 들어갔는데 잘 정돈되어 있고 먼지나 지지분한 것이 보이지 않으면 그 집 주인의 부지런함과 깔끔함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살림살이들이 무질서하게 어지럽혀져 있고, 온갖 오물들과 쓰레기가 방안 가득 굴러다니는 집을 보고 나왔다면 비록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그의 게으름과 무기력한 인간성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정확히 전자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우주와 만물은 심지어 인간의 탐욕으로 아무리 심각하게 훼손시켜 놓아도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게 통제하여 두면 스스로 그 질서와 조화를 회복시키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 무생물의 존재에 하나님께서 부여해 두신 질서와 조화의 복원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장 선명하게 하나님을 설명해주는 피조물은 인간>

 

하지만 우주와 만물에 정교한 질서와 조화의 힘이 새겨져 있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할 존재가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어떤 인격적인 존재를 뚜렷하게 알게 해주는 증거들보다는 단순한 법칙과 원리들만을 발견하게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실 방편으로서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 중에서 인간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닮은 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살펴볼 때 이미 이 내용들을 생각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그분의 성품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관계들 속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의 연합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삼위일체적인 원리가 표현되어 또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신학적인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더라도 성경은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관계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의 관계를 통해서 신랑으로서의 하나님과 신부로서의 우리들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주로 아버지로 소개하시면서 부자관계라는 우리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왕과 신하의 관계로, 주인과 종의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을 향해서는 ‘나의 벗’이라고 칭하시기도 하셨고, 예수님을 통해서는 우리를 형제로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참으로 인간에게 존재하는 모든 역할과 관계들은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양의 조화>

 

오늘 말씀에서는 특히 그 모든 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는 남자와 여자의 연합체, 즉 성적인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신 일에 대해서 좀 더 심도 있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남자와 여자라는 두 가지의 성으로 지으신 후에 혼인을 통해서 거룩한 연합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연합의 체험을 가지고서 하나님 자신을 신랑으로, 택하심을 받은 인간들을 그분의 신부로 만들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최종적인 책인 요한계시록이 인류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을 일컬어 어린양의 혼인식이 있는 날로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남자와 여자로 존재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그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그분의 영원하신 계획을 깨닫게 하시는 임시적인 과정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에 빠지면 ‘너를 영원히 사랑해’ 하고 고백합니다. 그럴 때 그 말을 ‘나는 지금 니가 너무 좋아’ 그 뜻으로 알아들어야지 진짜 이 사람이 그 불타는 마음으로 영원히 나를 사랑해주겠거니 하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영원히’ 라는 그렇게 우리가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진실하게 말하려면 ‘죽을 때까지 사랑해’ 그러는 게 좋습니다. 그 말도 지키기가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아내와 남편으로 묶어 두시는 것은 영원한 계획이 아니고 이 땅에서 존재하는 동안 한시적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있지도 않는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롱하려고 했던 일이 있습니다. 고대의 결혼제도에는 형사취수제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취해서 형의 대를 이어지게 해주는 일종의 사회안전장치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결혼해서 자식이 없이 죽고 동생들이 차례로 그 형수와 결혼했으나 다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대로 부활이 있다면 나중에 부활할 때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의 아내라고 해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 아닙니까? 이런 속뜻이 들어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아주 간단하게 그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가복음12:24-25)”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를 낳고 기르고 하는 관계들은 모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도록 해주려는 임시적인 방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에서나 끝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너를 영원히 사랑해!’ 그런 소리 하지 말구요. 우리가 영원히 사랑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천국가면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깊고 높은 차원의 사랑으로 하나님 안에서 모든 천국시민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을 다 걸고 절박하게 영원히 사랑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부부로 사는 동안에 서로간에 하셔야 될 일은 그 알콩달콩한 사랑을 통해서 신랑되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누려질 참된 사랑을 깨닫는데 주력하셔야 합니다. 신랑놀이 신부놀이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배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가지고는 정작 하나님은 제껴버리고 지들끼리 ‘영원히 사랑해, 어쩌고...’ 그러면 결코 잘하는 짓이 아닌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인격적인 관계의 원초적인 기초는 온 우주 만물에 새겨져 있는 음양의 조화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에는 생물들뿐만이 아닌 무생물들에게까지도 음과 양의 조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적용시키신 하나님 자신이 가진 지혜의 일관성이라고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생명이 없는 사물들 속에도 그런 음양의 조화로 연합의 속성을 표현해 두셨고, 생명체에 이르러서는 암 수의 결합으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원리로 채용하셔서 그것을 한 차원 더 높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이르러서는 남자와 여자가 성적으로 하나가 되는 존재방식을 통해서 극치의 사랑과 순결한 헌신, 완전한 연합 등,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해서 우리 수준에서 체험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한 몸이 되도록 하신 것은 다른 생물들이 암수 짝을 이룬 것과는 차원이 다른 신비로운 계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짐승들의 암수의 조화는 단지 본능에 새겨진 특징대로 서로 끌리는 것일 뿐이지만 인간의 성적인 존재양식은 육체만이 아니라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전인격적으로 서로 사랑하며 화합하여서,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가장 근접하게 느껴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영원히 한 분으로 연합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가장 중점을 두신 원리는 각각의 존재가 개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철저히 하나가 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심오한 비밀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각각의 개별적인 존재가 한 몸으로서의 연합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사랑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구분된 개체라도 진실한 사랑으로 연합하면 한 존재일 수 있지만, 서로 미워하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단지 부부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류는 전체가 결코 제각각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 아담 안에서 한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자녀를 낳고 또 자녀를 낳아도 그들은 여전히 '사랑이라는 원리로 하나'여야만 했습니다. 수십억, 수백억의 개체들이 생겨나도 그 각각의 개체들이 모두 사랑의 원리로 완전하게 하나로 연합되어 거대한 한 존재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인류라는 실체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러신 것처럼 사랑이라는 원리로 개체의 이기성을 영원히 극복하고 언제나 거룩한 하나를 이룰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인류를 향해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헌법>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려고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가장 기초가 되는 법은 처음부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여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상대방도 동일한 사랑으로 사랑할 때 비로소 서로 연합되고, 온전한 하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고 표현한 말이 바로 이 원리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여자를 창조하시고 사랑의 계명을 세워주심으로써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되는 두 가지의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첫 번째의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통해서 밝히신 법으로서 '네 위에는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니 너는 영원토록 그분의 명령을 지키고 자발적인 사랑으로 그분께 복종하며 즐거워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 하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주어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이야기 속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나머지 명령이 세워진 것입니다. 이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성경의 모든 계명들은 다 한 씨앗에서 나온 줄기와 가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이 두 가지의 핵심 원리가 모든 하나님의 법의 씨앗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우기 원하셨던 법은 첫째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가 아래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창세기 2장의 교훈을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라고 기억해 두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헌법을 풀어서 설명한 십계명>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이렇게 단순한 헌법의 원리만 가지고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나서는 우리의 마음의 둔해지고 완악해졌기 때문에 이 법을 보다 세부적으로 선포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훗날 십계명과 다양한 율법의 조항들입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를 통해서 '너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의 명령을 지켜라' 하고 단순하게 명령하면 되었는데, 죄 지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자기들의 욕망을 만족시켜 줄 다른 신들을 자꾸 만들어 내게 되자 하나님의 명령은 보다 구체적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네 마음대로 공상해서 만들어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께 배운 진리대로만 그를 섬겨야 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무 형상으로도 표현하지 말고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예배해야 한다. 이것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두 번째 계명의 뜻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만만히 여길 대상이 아니시니 그 이름을 함부로 들먹거려서 거짓맹세를 하거나 저주를 하는데 써먹지 말고, 또 함부로 행동해서 그 이름에 먹칠하는 행위를 하지 말고, 범사에 그 이름을 존귀하고 두렵게 여겨서 경외함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 말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지니라 하는 3계명의 뜻입니다. 네 번째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태만히 할 것을 아시고 태초부터 세운 그 안식의 소망을 계명으로 선포하시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로 삼으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라서 사람에게 대한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부모라는 존재는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권위,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나타낼 수 있는 권위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곧 권위의 실체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대한 율법도 처음에는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해라' 그러면 되었던 명령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서 인간이 지극히 이기적이고 완악해졌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도 더욱 세분화 시켜서 구체적으로 죄악을 지적하고 금지할 수밖에 없도록 되었습니다. 이웃의 생명을 해하려는 모든 마음의 동기와 행위를 금하는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이 주어졌습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지극히 탐욕스럽고 음란해졌기 때문에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명령도 필요했습니다.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남의 것들을 훔치는 일도 마지않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하는 계명이 필요했습니다. 마귀에게서 흘러들어온 죄악의 심성 때문에 언제나 거짓말을 일삼고 제 유익을 위해서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들을 서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하는 계명도 필요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부패한 마음의 실체를 우리에게 지적하고 경고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하는 단호한 명령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단순한 새 계명과 몸의 원리>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사람들에게 거듭난 생명을 주셨을 때, 계명은 다시 단순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단순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위로는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인간들끼리 서로를 향해서는 서로를 자신과 같이 여겨서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무너졌던 최초의 하나님 나라의 헌법이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진리를 몸의 원리로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믿음으로 회복된 인류는 그의 몸을 이루는 지체의 각부분이라는 설명입니다. 과학자들의 말로는 우리 몸속에 약 백조개의 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세포들은 모두 개별적인 생명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하나의 몸이라고 하는 한 존재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복종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를 한 몸을 이루는 각 지체들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나와 연결된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몸이 이미 그 진리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 훌륭한 교과서입니다.

 

우리의 몸속에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잡아먹는 역할을 하는 대식세포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듯 몸 어느 한 부분에 고정되어 붙어있는 존재가 아니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흔히들 백혈구라고 부릅니다. 백혈구는 인간의 몸속에 약 250억 개 정도가 있는데 그것들이 다 내 몸 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면서 병균들이 들어오면 잡아먹는 역할을 함으로써 몸에 유익한 일을 담당합니다. 얘네들은 팔이나 다리처럼 우리 몸에 고정되어 붙어있는 것이 아니고 별도의 살아있는 개체로서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백혈구들은 틀림없이 나라고 하는 존재의 일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뇌의 지배를 받으면서 몸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살고 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몸 속에 백조개라는 엄청난 숫자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한 몸의 유익을 위해서 기꺼이 살고 기꺼이 죽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분명히 서로 구별된 객체로 각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지배를 받으면서 그분의 유익을 위해, 그분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는 한 몸의 지체들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분리하고 싸우면 둘 중에 하나는 적군인 겁니다. 아군끼리 싸우는 법은 없습니다. 바울이 분열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어찌하여 나뉘었느냐면서 심각하게 책망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몸의 원리에 따르지 않고 머리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이기적인 욕망으로 탐욕스럽게 자신을 끝없이 복제하면서 몸의 균형을 깨뜨리는 존재를 두고 우리는 암세포라고 그럽니다. 그런 세포는 전체 몸에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고 마침내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는 악한 존재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 모습의 우리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고 철저히 서로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회복된 질서 안에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악한 성향들을 말씀의 권능으로 죽임으로써 몸의 생명을 온전히 회복시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최초의 원리를 아는 자로서 우리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초 이상이 이러하셨기 때문에 죄로 인해서 부패된 상태를 지적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철두철미 하기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을 통해서 단지 ‘미련하고 무정하고 사랑이 결여된 마음’까지도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죄의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세상은 그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품든 이웃에게 적극적으로 해만 끼치지 않으면 전혀 죄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원래의 뜻과 어긋나 있는 모든 마음의 상태를 지옥의 형벌을 받을 만한 심각한 죄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를 영원히 사면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용서받은 사랑 안에 거하면서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이기심과 무관심한 태도까지도 극복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로 회복되기 위해서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실 때의 참된 우리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희생의 제물로 받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은 죽은 다음에나 천국에 가라는 것이 아니고 지금부터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 어디든 내가 있는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어 가라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매일 눈 뜨실 때마다 자기 안에 들어있는 자아숭배와 이기심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되시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곳곳에서 천국을 건설하시는 서부중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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