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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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2:16-19 --- 선악과 명령과 일하는 땅
진주호 2015-01-27 추천 0 댓글 0 조회 695

 

 

지난 시간에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명령이 가진 가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해 드렸습니다. 오늘은 선악과 명령이 말해주는 세부적인 의미에 대해서 몇 가지 더 생각해보고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나머지 일들도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악과 명령의 세부사항>

 

어떤 사람들은 선악과가 무슨 과일이었을까 이런 걸 궁금해 하고 중요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누구는 사과라고 그러고 누구는 무화과라고 그러고, 어떤 이단 종파에서는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그래서 복숭아를 안 먹는 단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는 그게 무슨 열매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과라도 괜찮고 배도 괜찮고, 귤도 좋아요. 심지어 낑깡이래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선악과는 그 과일의 종류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오직 그 나무에 하나님과의 거룩한 약속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다른 건 다 네 임의대로 하되 저 열매만은 먹지 말아라. 그리함으로서 네 위에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걸 늘 인정하며, 내 명령에 스스로 복종하며 나를 영원토록 사랑할 것이라고 표현해다오! 네가 그 약속을 깨뜨리고 너의 마음에서 나 하나님을 거절하고 제껴버리면 네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걷어 차는 결과가 될 것이란다. 너는 죽음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네가 내 명령을 묵살하고 또 너를 창조한 나 하나님을 거절하여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는 생명의 근원인 나와 철저히 단절되어서 정녕 죽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말씀들이 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마음껏 행복하고 즐겁게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단 한 가지 그 모든 행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선악과를 통해서 일깨워주면서 말입니다. 그분을 의식하고 그분을 존경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인간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않는 단순한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이토록 높고 깊은 믿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선악과 명령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라는 걸 가르쳐 주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너는 자신이 아무리 아름답고 지혜롭고 뛰어나도,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모든 것을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킴으로써만 진정한 행복과 존재의 이유와 가치와 목적을 정할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하여 철저히 의존적인 존재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명령을 주시면서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너 내 말 안 들으면 죽을 줄 알아라' 하는 협박하는 분위기의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 경고 역시도 우리가 하나님을 벗어나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하시는 간곡한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를 목숨보다 사랑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이 물고기 보고 '얘야, 물 밖으로 뛰어나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날에는 너는 틀림없이 죽게 된단다' 그랬다면 이게 협박하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물고기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간곡하게 당부하는 말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협박이 아니라 간곡한 사랑의 당부이신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린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오해하곤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심을 잘 이해하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들과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잘 깨달을 수가 있게 됩니다.

 

선악과에 새겨진 또 다른 뜻은 '너는 내가 가르쳐 주는 관점대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네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선과 악을 결정할 권한은 너에게 있지 않고 오직 창조자인 내게만 있는 거란다' 이걸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주제는 제가 창세기에 대한 강해중에서 '하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드신 존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일차적으로 한 번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교훈들을 선악과라는 과일에 새겨두고 아담과 하와가 섣불리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들로서 우리 자신의 감각과 판단력이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늘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세상 만물을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피조물로서의 가장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신학용어로는 '계시 의존 사색'이라고 말합니다. '계시 의존 사색'이란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관점으로만 만물을 대하며 생각과 사상까지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정립하려 하고,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며 언제나 겸손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진리를 배우는 자리에 있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의 비밀을 우리의 눈으로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작은 것들도 보이지 않고 너무 거대한 것들도 볼 수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는 알갱이가 되는 핵을 중심으로 전자라고 부르는 것들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구조로 생겼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긴 원자를 들여다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과학책에서 보는 그림들은 '아마 그럴 것이다' 하는 상상의 도표일 뿐입니다. 과학자들은 그런 상상의 모형들을 여러 가지 간접적인 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뿐이지 원자나 그것보다 더 미세한 단위의 사물의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실체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의 영역속에 남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에게 탐구할 수 있도록 허락된 영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신비로운 우주의 비밀을 힘을 다해 탐구해나가면서도 우리가 결코 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설명을 기다려야 하고 우리가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초월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우리의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낮은 소리도 들을 수 없고 너무 높은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부분만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악과의 명령에 순종함을 통해서 모든 선악에 대한 판단과 결정의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순종의 행위는 우리 자신이 주제넘게 선과 악을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만 세상을 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참된 인간이란 자기 눈에 분명히 팥으로 보여도 하나님께서 콩이라고 하시면 콩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갖춘 존재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한 인간입니다. 우리끼리 무언가를 판단해서 선하다 악하다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반드시 여쭈어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언14:12)을 통해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는 자기의 눈과 자기의 판단력을 말씀보다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사야서55:8-9)에서는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고 주장하십니다. (잠언3:5-8)에는 이르시기를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 명령에 새겨져 있던 태초의 원리를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일관성 있게 선포하신 동일한 사상의 말씀인 것입니다.

 

마귀는 피조물인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 모든 것을 하나님 없이 판단하고 제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하는 교만 때문에 정죄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면 죄에 대한 관점과 규정이 매우 달라지게 됩니다. 사실 인간들만의 기준을 가지고는 죄라는 의미가 성립이 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죄라는 의미가 모호해지고, 참과 거짓을 나누는 절대적인 진리가 부정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불신앙의 세상이 도달하는 종착점은 상황윤리로 인해서 빚어지는 시행착오와 혼돈과 무질서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남자에게 여자가 여자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것을 동성애라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이성에게 끌리게 마련인데 인류에게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서 그 성적 취향이 잘못된 방향으로 뒤틀려져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동성애 성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현재 펼쳐진 상황만을 가지고 인간을 판단할 수밖에 없고 다른 기준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그건 개인적인 취향일 뿐인데 우리와 성적인 취향이 다르다고 그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동성애자들끼리 결혼도 하고 그걸 국가에서 합법적인 부부로 인정해주는 나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판단을 배제하고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면 죄라는 기준은 아주 모호해지고 맙니다.

 

'동성애자들은 저주를 받고 지옥에 갈 자들이니까 교회에 발도 못 붙이게 해야한다'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안에 들어있는 잘못된 성향들은 다 어떻게 할 겁니까? 이웃의 전토나 집이나 그의 아내나 남편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를 탐내는 존재들인 우리 모두가 매순간 지옥으로 끌려가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린 모두 그런 탐욕의 존재들로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우리 주님의 피 흘리신 사랑을 통해서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 나라로 초대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께서 주신 거듭난 생명력으로 내 안에 있는 죄의 성향과 끊임없이 고뇌하며 싸우는 거룩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과 싸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에게 여자가 여자에게 성적인 사랑을 느낀다는 그 마음 속 욕망 자체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마음속에 탐심을 품는 것과 다르지 않은, 죄라고 하는, 인류가 빠져 있는 일종의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원천적인 죄의 성향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심판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해서 간음이나 도적질을 뻔뻔하게 저질러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속에서 그런 죄의 마음과 행동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매일 죄와 싸우는 거룩한 존재가 되라고 명령받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동성애적인 욕구를 가진 자라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비틀린 자기의 욕망과 싸우면서 그 욕망을 하나님의 거룩한 뜻 안에 가두어 두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동성애적인 성향을 자기 속에서 다스려 두지 않고 '나는 동성애자다' 하고 당당히 밝히는 것을 일컬어서 '커밍아웃'이라고 합니다.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게 아니라면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는 자기들이 더 이상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밝혀서 욕망이 이끄는 대로 동성애적인 삶을 대놓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은 교회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나는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끌리는 성적인 욕구가 있으니 더 이상 그런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지 않고 자유롭게 바람을 피고 살겠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똑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지만 맘 편히 죄를 짓고 살으라고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 죄와 더불어 싸우라고 용서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선과 악에 대한 규정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선악의 판단자가 되겠다고 하는 건 '선악과를 범하는 죄악이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두고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 없는데 무슨 죄냐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그런 잘못된 욕망은 죄악의 부패함이 만들어낸 심각한 부작용일 뿐이다. 그것은 치유와 회복을 위해 애통하며 기도해야 할 일이지 그런 욕망을 만천하에 밝히고 당당하게 충족시키면서 살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계명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선악과 명령을 믿음 안에서 다시 회복시키는 길인 것입니다.

 

오지에서 살아가는 에스키모인들과 몽골인들은 어쩌다가 외지에서 남자 손님이 오면 아내를 빌려주는 이상한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 외진 곳에 소수의 가족 단위로 떨어져서 살기 때문에 동족 간에 근친혼이 불가피 해서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비정상적인 아이들이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외부에서 누군가가 오면 그 사람의 씨를 받아서 건강한 종족을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이 풍속을 소개해 놓은 어떤 사람이 맨 마지막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상하게만 보이는 이런 풍습이 그들에게는 극한 상황에서의 너무나 처절한 종족 보존책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속뜻에는 '그러니까 비난해서는 안 된다' 뭐 이런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선악의 기준을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이해하여 주려고 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상황윤리에 빠져들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원리에 어긋나는 것, 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모든 것, 하나님과 상관없이 행해지는 모든 일이 죄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들이 모두 그러한 죄에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용서와 죄 사함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도 깨달아 애통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이 세상의 모든 부분이 그런 죄와 악함으로 오염되고 부패하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여 피조물들의 모든 탄식과 고통이 끝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또한 그 나라가 임할 때까지 우리 자신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하늘의 족속들로서 어둠의 땅에 소망의 빛을 비추며, 하나님의 의를 세우려고 애쓰고 부패하는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애쓰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옥이란 형벌은 너무 가혹하다고?>

 

선악과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깟 나무열매 하나 먹었다고 하나님이 지옥까지 만들어 놓고 화를 내시면서,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너무 가혹한 처사다'그렇게 비난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인간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화를 내면 안 되고 지옥 같은 걸 만들어 협박을 하면 더더욱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는 내 사랑을 거절하고 배반하는 자에게 노여움을 표현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랑 정분이 생겨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그 마음이 '물처럼 고요하다'면 그 사람은 상대방을 진짜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필연적으로 배반과 거역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게 되어 있고 그 분노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명절 같은 날이 되면 아이들이 문방구에서 폭죽을 사서 터뜨리고 놀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콩알탄 이라는 것이 있는데 던지면 아무 다른 위험은 없이 소리만 요란합니다. 하지만 총알을 쏘게 되면 사람도 죽게 되고 바위나 콘크리트에 맞으면 움푹 패이거나 구멍이 뚫리게 됩니다. 대포를 쏘면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보다 더 큰 구덩이가 파입니다. 미사일로 원자폭탄을 쏘면 한 도시나 나라가 초토화 됩니다. 폭발하고 남은 구덩이의 크기는 그 폭탄이 원래 가지고 있던 위력의 크기를 나타냅니다. 지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사랑의 크기를 말해주는 그분의 배반당하신 슬픔과 분노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옥이라는 그토록 혹독한 심판과 형벌이 있다는 건 그 이전에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이 무한하고 위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그 사랑을 걷어차고 모욕하고 평생을 통해서 외면해 버린 사람이 지옥 문 앞에서 할 수 있는 변명이란 정녕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가서의 한 구절이 바로 그 진리를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6)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지옥)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아가서8:6-7)"

 

지옥이 무섭고 끔찍하다고 느껴진다면 그 지옥을 불평하기 전에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간절하심이 그 정도로 크시다는 걸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거절하는 인류 중에서 택하신 자들을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무조건적인 은총을 입히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분은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우리들을 그 지옥에 집어넣지 않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택하신 자들을 대신해서 지옥형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신 그 하나님을 가슴 뜨겁게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아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전체는 이 위대한 구원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먹고 노는 땅이 아이다∼>

 

우리가 그 위대한 구속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아직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일들을 마저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원하셨던 최초의 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낱낱이 알아야 죄로 인해 망가진 범위가 어느 만큼인가를 알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명령 다음으로 나오는 중요한 구절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각종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만물에게 부여하신 가치와 의미와 목적을 찾아내야 하는 사뭇 어려운 작업입니다. 아담은 콧구멍을 쑤시면서 삐딱하게 앉아서 동물들이 지나갈 때 '너는 코가 기니까 코끼리라고 해라' '너는 미련하게 생겼으니까 곰이라고 해라'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닙니다. 각 존재들에게 합당한 존재규명을 해주고 만물의 쓰임과 그 용도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밤새워 연구하고, 그 결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이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 실로 막중한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상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다 해놓으시고 인간은 입만 벌리고 감탄만 하면 되는, 그런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과는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일을 하게 만드시고 그 결과를 보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감탄해 주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아담이 무슨 일인가를 해낸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또 하나님께서 다 해주시면 모든 것이 철저하고 완벽하겠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아담에게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여 스스로 연구하고 동물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름을 짓도록 해서 그 결과를 하나님께 내어 놓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한 일을 대견해 하시고 칭찬해 주시고 상을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겁니다.

 

흔히 에덴동산을 낙원 또는 파라다이스라고 부르면서, 할 일 없이 먹고 빈둥거리는 관능의 장소로 착각하는 일이 있는데 그건 2장 맨 끝에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다는 말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은 옷을 벗은 남자와 여자가 "아담 -, 하와 -" 그러면서 뛰어다니는 철없는 놀이터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온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 나갈 막중한 사명과 책임이 지워진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먹고 놀기만 하고 게으른 것을 심판받을 만한 죄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자신에게 부여된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땅에 묻어둔 한 달란트 받은 자를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부르시며 심판을 명하십니다. 게으름과 무책임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지런하고 치열한 열심으로 살아야 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향해 가지신 그분의 목표가 높고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순히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맹목적인 영생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존재와 성품이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하시며, 지극히 영광스러운 존재로 끌어올리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1:1-7)"

 

우리는 이 계획의 풍성함과 그 크기와 심오함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 영광이 하늘에 속한, 영원에 속한, 말로 표현치 못할, 천사도 부러워 하는 그런 영광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1:23)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온 우주와 만물을 충만하게 만들 하나님의 비밀병기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때문에 온 우주 만물이 그 의미와 가치를 드러낼 것이며 그 일이 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무대는 이 좁은 지구 위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고, 영생이라는 조건 속에서 그 무궁한 신비로움 속으로 영원히 참여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루하루는 근면하고 성실한 열심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게으르거나 방탕해서는 안 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선한 교양과 깊은 지혜의 안목을 갖추기 위해서 저마다 노력해야 합니다. 매일 정해진 분량의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묵상하면서, 진리의 지식에 입각한 눈으로 인생을 보고 상황들을 분별하며, 거룩한 목적으로 물질을 사용하는, 그런 훈련들을 끊임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비록 학벌은 자식들보다 높지 못해도 말씀을 통한 지혜를 갖추시고, 기도하며 응답받으신 체험도 갖추시고, 성실하게 살아낸 삶의 열매들을 통해서, 자녀들을 훈계하고 지도할 말을 일평생 가지고 계실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힘을 다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그렇게 힘써 추구해야할 저마다의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일에 부지런하고 충성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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