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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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2:4-17 --- 생명나무의 의미와 선악과의 가치
진주호 2015-01-27 추천 0 댓글 0 조회 876

 

 

<인간에게 맞춰진 스포트라이트>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안식하셨다는 표현'과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통해서 온 우주와 만물이 궁극적으로 도달해 가야할 가장 영광스런 상태가 앞에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그 궁극의 완성을 위해서 남아 있는 일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원리를 가지고 과연 그 원리대로 참되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이야기의 스포트라이트는 자연스럽게 인간에게로 그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을 아무 것도 보탤 것이 없는 완벽한 낙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곳은 최종적인 완성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치루어야 하는 땅, 테스트를 받아 합격점을 받아야 하는 시험장 같은 곳이었고, 힘을 다해 펼쳐 나가야 할 역사적 과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인간은 피조물들의 영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원리 안에서 기꺼이 살아가는지, 그 여부를 테스트 받은 후에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을 향해 자라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 테스트를 일컬어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계약이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계약은 아담의 선택에 의해서 결과가 좌우된다는 의미에서 ‘행위계약’ 또는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행위언약이란 선택의 능력이 인간에게 있을 때에만 가능한 계약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채로 세상에 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인류는 생각하고 선택하는 모든 것이 악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을 알고 있어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마음으로 세상에 왔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는, 행위를 통한 영생의 계약을 맺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 편에서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의 구원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해당하는 언약은 '행위언약'이라고 그러지 않고 '은혜언약'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탐내지 마라' 그러면 내 안에 탐심이 가득하다는 걸 발견할 뿐입니다. '간음하지 마라' 그러면 음란함이 가득한 내면을 들켜요. '살인하지 마라' 그러면 증오와 살인의 충동이 도사리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아래 놓인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지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지옥의 형벌이 마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애통하며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우리와는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우리처럼 죄악으로 부패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타락하기 전에는 일방적으로 죄로 기우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해 주셨을 때, 그 마음과 생각에 찬란한 빛이 있었고 위엄과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맺은 최초의 계약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냐 불순종할 것이냐를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있었던 계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그 계약을 일컬어 '행위언약'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물론 이 계약은 전혀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그 명령을 잘 시행하고 넉넉히 합격점을 받을 수 있도록 충분한 능력도 주셨고 뿐만 아니라 그를 더욱 지혜롭게 만들어 주기 위한 계시의 도구들도 함께 주셨기 때문입니다.

 

<생명나무의 계시>

 

제일 먼저 아담에게 주신 계시는 '생명나무'입니다. 이 생명나무는 아담에게 생명의 원리를 알려주는 도구였습니다. 이 생명나무에는 아담이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의 육체가 병들거나 쇠약해지지 않고 끝없이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신비로운 효능이 들어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생명나무 열매에 그렇게 실제적인 효력이 들어있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굳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화염검을 가진 천사들을 배치시켜서 그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이 생명나무는 훗날 모든 믿음의 싸움을 이기고 승리한 천국시민들에게 다시 제공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계시록22:2)에는 그 나무의 효능을 이야기 한 구절이 있습니다.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계시록22:2)" 쉬운 번역으로 읽으면 "강 양쪽에는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생명나무는 그 잎사귀와 열매가 모두 특별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지 않는 생명을 보장하실 때 그것을 먹는 나무 열매의 효능을 통해서 유지하도록 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아담의 생명 자체를 늙거나 쇠약해지지 않는 영생의 품질로 만들어 놓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효능이 있는 음식을 지속적으로 먹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도록 하셨다는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물질세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순수한 영이신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보거나 만질 수가 없으니까 생명나무의 효능을 맛보면서 그것을 통해서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매 번 생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무엇이든 당연히 그런 것으로 아는 일에는 감동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음식을 먹지 않고 물을 마시지 않아도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전천후 에너지가 자체 생산되는 육체를 주셨다면..., 음식은 그냥 맛과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먹으면 속에서 완전 연소가 되어 찌꺼기도 하나 남지 않는 그래서 똥도 안 싸고 오줌도 안 눠도 되는 그런 몸으로 만들어 주셨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교만하고 감사를 모르는 존재들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만 밥을 굶어도 비실비실 해지고 먹으며 번거롭게 똥도 싸고 오줌도 누어야 하는, 한계를 분명히 가진 육체를 가지게 하심으로써 매일 매끼 식사를 할 때마다 그 양식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을 떠올리고 감사하도록 지어주신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 놓으셨는데도 감사를 안 하고 살아요... 어쨌든 아담은 생명나무 열매와 잎사귀를 먹어야만 늙지 않고 쇄약해지지 않고 젊음과 건강과 생명을 끝없이 누리도록 되어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한 생명의 공급자로 늘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도를 가진 시청각 도구를 신학적으로는 '성례전적인 도구'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주 행하게 되는 '세례식과 성찬식'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진리를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매개체를 가지고 깨닫고 확신하게 해주는 시청각 도구인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특히 먹고 마시는 행위가 개입되는 성찬식과 비슷한데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은 영적인 사실을 물질적인 도구들을 통해서 깨닫고 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눈에 보이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신뢰의 관계 즉 오직 믿음으로 연결된 영적인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 시청각적인 장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창조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주는 성례전적인 시청각 도구인 것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고 그분의 은혜를 감격스럽게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비로소 참된 인간인 것입니다.

 

이 생명나무는 우리가 그냥 평범하게 생각하는 나무 열매일 수도 있고 생로병사의 비밀을 밝혀줄 생명공학적인 신비로운 그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은 없지만 일단은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열매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이 생명나무가 다시 등장하게 될 때, 거기서는 믿음을 가지고 영적인 승리를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상급으로 주어진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요한계시록2:7)"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아담에게 있어서 단순히 육체가 병들거나 늙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생명이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을 통해서 영적인 완성의 자리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또 하나의 선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그러한 영적인 연합이 없이 다만 인간의 땅에서 하나님이 없는 영생을 한다면 그것만큼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하며, 권태로우며, 이기적이며, 혼돈스러운 존재입니다. 설령 죄로 인해 어둡게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신적인 영광으로 충만케 해주시는 그 하나님과의 연합이 없다면 인간 자체만 가지고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누린다 한들 그것은 축복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의 생명나무>

 

우리 입장에서는 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자칫 현재의 우리 자신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전설 속의 나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학자들은 이 생명나무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나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도 천지와 만물의 목적이 되시며 생명의 공급자가 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고, 그분을 통해서 모든 것을 공급받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누리게 된 생명과 능력은 모두 그분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요한복음1:1-4)이 밝히고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1:1-4)"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인간의 타락이 없었더라도 우리의 삶의 목적과 영생의 원리가 다름 아닌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셨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도 인간과 우주를 향한 가장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것은 성자 하나님을 궁극적인 푯대로 세우시고 모든 만물들을 그분 안에서 통일되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삼팔선 무너지는 통일 말고, 모든 만물들이 그분께로 존재의 가치와 목표를 두게 만드시는, 그런 질서정연하게 조화로운 우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랬고, 계속해서 8절에는)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1:3-10)"

 

물론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 주님의 이름은 최소한 예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말에는 '우리를 구원 하소서' 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 대신에 다른 이름으로 그분을 불렀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서 영생하시는 하나님과의 가장 영광스러운 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이셨으므로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그 의도가 실패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원리를 다시 세우셔서 처음의 그 뜻을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고 온전히 이루고야 마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뜻을 이루게 될 당사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자신의 존재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을 음식으로,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까지 비유하셨습니다.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요한복음6:47-57)"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영원한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 대한 이 신비로운 진리를 교육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영원한 내 아들 안에서 천사들보다 뛰어난 존재로 완성되어 그의 신부로 예비 되어질 존재들이니 거룩하고 거룩할지어다' 이것이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진정한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다시, 비록 타락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이 생기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위대한 계획에 초대함을 받아서 이렇게 하나님 앞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구속의 원리 안에서 그 생명나무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영원한 푯대로 삼아 매일 그분께로 달려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생명나무라는 시청각 도구 정도가 아니고 우리 역사 가운데 친히 찾아와 주신 생명나무의 실체이신 그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갑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까지 기억하고 매일 교제를 누림으로써 천국의 생명나무보다 더 귀한 사귐의 특권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되고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를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그 주님의 품으로 힘을 다해 달려가 안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선악과의 계시>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고 인류가 지금과 같이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된 나무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에게는 생명나무 보다 이 선악과가 더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게 하시고 유일한 한 가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금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코 죽으리라는 경고를 함께 주셨습니다. 아담은 이 선택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죽음과 파멸을 경험하지 않고 죄가 없는 거룩한 연합을 통해 영생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주셔서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사랑의 관계'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가장 많이들 하는 선악과에 대한 오해는 '그걸 왜 만들어서 인간을 함정에 빠뜨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선악과라는 장치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이용당하는 비인격적인 도구가 아니라, 존귀한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무한한 축복의 장치였다는 걸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선악과가 없었다면 인간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을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게 더 완전한 존재일 것 같지만 만약 인간에게 순종할 것이냐 거역할 것이냐를 자유롭게 선택할 선악과의 시험이 없었다면 인간은 자율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정답밖에는 꺼낼 줄 모르는 로보트나 프로그램화된 컴퓨터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에게 배반할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열어놓으신 채로 자유롭게 선택의 시험을 치르도록 하신 것이 대단한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자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만큼 지극히 존귀한 존재로 대접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특성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배반의 가능성을 포함한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어야만 비로소 사랑이라는 말이 성립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배반할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의 사랑이란 사랑인지 조건에 의한 거래인지가 불분명해집니다. 욥기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탄아,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가 얼마나 순전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지... 나는 그의 믿음과 사랑이 정말 기쁘다. 가장 아름다운 걸 주었음에도 배반해버렸던 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느냐?' 그런 의미를 전달하셨습니다. 하지만 마귀도 쉽게 물러설 존재가 아니죠. 그가 말했습니다. '욥이 하나님 당신을 섬기는 건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온갖 것으로 만족스럽게 주셨는데 안 섬길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단지 손익계산을 하고 그에 따른 약은 처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에 그가 가진 것들을 빼앗아 보십시오. 아마 거품을 물고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할 걸요?' 그랬습니다. 그 상태에서 멈추었다면 욥의 순전한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결코 증명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시험이라는 위기의 조건을 지나가야 비로소 그 가치가 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비유긴 하지만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할 때, 가장 큰 위기는 남자가 군대를 가는 겁니다. 예전에는 모두들 3년을 꽉 채운 군생활들을 했었습니다. 서로 죽네사네 하는 사이였다가도 3년이라는 시간을 강제로 떨어져 있게 만들면, 그 기간에 수많은 커플들이 찢어지곤 했습니다. 기다리는 여자에게 '배반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 한 두 달은 보고싶고 그립다고 눈물 자국이 선명한 편지도 보내오고 면회도 오고 그럽니다. 하지만 남자친구의 빈 자리에 누군가 새로운 근사한 사람이 나타나면 얘기가 확 달라집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또 제대를 해도 기껏해야 다시 대학생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없는 빈 자리에 군대도 다녀왔고, 졸업도 했고, 직장도 튼튼하고, 거기다 잘 생기기까지 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좋아한다면서 자기를 따라다니면, 그런 사람을 뿌리치기가 결코 쉽지가 않은 겁니다. 그럴 때 여자들이 내리는 결론은 ‘그래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었어 너무 어려서 뭘 몰랐던 거야 지금 이 사람이 진짜 사랑인 거같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긴 광고가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였습니다.

 

그런데 내 여자 친구는 그 어려운 3년을 기다려 주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소문을 듣자니까 조건이 좋고 훤칠한 남자들이 여러 차례 대시를 했는데, 그런 거 다 뿌리치고 오직 머리 깎은 자기를 한결 같이 기다려준 이뿐이가 있었다면... 그 증명된 사랑의 기쁨은 처음 콩깍지 시절에 비할 수 없는 깊고 높은 차원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배반할 자유'와 '3년의 공백'이라는 시험을 원천 봉쇄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말도 안 되는 예지만 영화에서처럼 여자가 자기를 배반할까봐 납치를 해서 3년 동안 어디다가 감금해 놓았다가 제대해서 만난다면 그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다고 삿대질을 해댑니다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를 보이지 않은 사슬로 묶어서 개처럼 취급하신 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선악과를 통해서 '배반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존귀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 우주 안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불러 주셨다는 진정으로 위대한 축복의 상징물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선악과는 인간에게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시고 그 자유로운 선택으로 하나님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신 하나님의 사랑의 초대장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을 잘 정리해야 그 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살아나게 됩니다. 선악과를 제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됩니다. 그까짓 나무 열매 하나 먹었다고 온 세상을 저주하고 지옥을 만드시고 그럴 수 있는 거냐면서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고 간절하신 사랑으로 인류를 대하셨는지를 이해한다면 배반당하신 그 슬픔의 크기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단번에 지옥으로 쓸어 넣지 않으시고, 그들의 반역의 역사를 진행시켜 주시면서, 수 천 년간 우리와 같은 교만한 피조물들이 뿜어내는 멸시와 모욕을 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파렴치한 죄인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셔서 택하신 자들을 기어이 구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절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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