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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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2:1-3 --- 안식일의 실천
진주호 2015-01-27 추천 0 댓글 0 조회 841

 

 

<하늘을 바라보라>

 

지난 시간에는 안식의 원리에 대해서 밝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주고 거룩하게 하신 일곱째 날은,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 예비되어 있는 영원한 영광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고 했었습니다.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보다 더 높고 영화로운 안식으로의 초대가 있었다면 죄로 인해서 망가지고 부패한 지금의 자리에서는 얼마나 더 그 안식을 바라보고 사모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초대받은 그 영원한 삶이, 참으로 귀하고 값진 것임을 알아야, 눈에 보이는 이익을 포기하고 기꺼이 거룩과 영광을 위해서 달려갈 텐데, 그 가치에 눈을 뜨기가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을 삼고 살아가면 헛되고 헛된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주께서 예비하신 그 영광을 기억하라고 간곡하게 권면합니다.

 

<마지 못해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거룩한 약속의 가치를 자꾸만 묵상하고 내 안에서 가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중하여 길러내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자꾸 마음을 빼앗기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영이에게 장난감 인형과 100억이 들어 있는 예금통장을 동시에 내민다면 어느 걸 집겠습니까? 젖먹이 어린 아이들한테는 100억이란 돈의 가치가 막대사탕 하나만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고 선택하라면 어느 걸 선택합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 통장이 만들어 줄 수 있는 만족스러운 그림들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 통장 안에는 크고 전망 좋은 아파트도 들어 있고, 안전하고 폼 나고 비싼 자동차도 들어 있고, 명품 옷 명품 가방 별거 별거 다 들어 있고, 심지어는 효도하는 자식들까지도 들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훤히 보이니까 당연히 선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보여야 그 쪽으로 달려가게 되는 족속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느 날 기도하다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건너다 보았습니다.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린도후서12:1-4)"

 

이렇게 하늘을 건너다 본, 천국을 들여다 본 그 강렬한 경험 때문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19) 여러분이 나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나를 돕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풀려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 (하지만)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기 원합니다. 2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것도 내게는 유익합니다. 22)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다면,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 곁에 있고 싶은 까닭은 그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4)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줄을 알고 있습니다. 25) 내가 여러분 곁에 머물러 여러분의 믿음을 자라게 하고, 또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 줄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립보서1:19-25)"

 

마음은 온통 주님 계신 천국에 가 있는데, 너희를 도와야 되겠어서 마지못해 할 수 없이 더 살아야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양반처럼 온통 하늘에 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안식일의 원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여주면 하겠다고?>

 

제가 고등학교 때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몇 안 되는 가정들이 마치 한 식구들처럼 정겨웠어요. 그 때는 금요일 저녁이면 철야를 했습니다. 11시경에 예배를 드리고 자정이 지나면 난로 가에 둘러 앉아 간증들을 하곤 했습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는데 물질적으로 큰 몫을 감당하셨던 권사님 한 분이 그 자리에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솔직하신 분이셔서 어쩌다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당신은 아직 천국에는 안 갔으면 좋겠다고 아주아주 나중에 주님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그러시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돈도 넉넉하게 있고, 예쁘게 생겨서 사랑스럽게 구는 손녀들이 있었고, 효도를 다 하는 아들 며느리가 있었거든요? 여기서 사는 게 너무나 꿀 같은 거예요.

 

에이 그래도 권사님씩이나 되셔갖구 간증을 하면 말이래두 주님 곁이 더 좋다고 해야지... 누구든 쉽게 장담할 일은 아닙니다. 그건 장담을 가지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죽는 데까지 주와 함께 하겠다고' 장담했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고 두려움 속에 홀로되었을 때에는 속수무책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모쪼록 우리는 의연하고 담대하고 품위 있게 하나님 안에 있는 영광을 더 사모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을 그러실 겁니다. 바울은 세 번째 하늘, 하나님이 계신 그 낙원을 보고 왔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거죠. 나한테도 천국을 보여주시면 나도 그럴 수 있어요~ 바로 그런 말씀들을 하실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도요한을 통해서 계시록을 쓰도록 하신 겁니다. 요한 계시록은 '지구 종말의 메시지' '공포의 대왕이 오고있다' '노스트라다무스 묵시록의 저주를 기억하라' 뭐 이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핍박을 당하며 믿음 때문에 안락한 삶을 박탈당하고 여기저기로 피해 다녀야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늘의 커튼을 열고 '너희들을 위해서 예배된 영원한 영광의 도성을 바라 보아라' '이제 곧 이곳으로 올라오렴' 이런 분위기인 것입니다. 바울이 혼자 보고 와서 행복해 했던 그 천국을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이미 열어 두셨단 말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건 죄다 시시하게 여기고 눈앞에 번갯불이 번쩍거리는, 꼭 뭘 봐야 되시겠다면 할 수 없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 건 성경을 읽고 확신을 가지는 것이 번쩍거리는 걸 보고 오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유익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는 이쪽이 하나님께서 표준으로 정해두신 제일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의 원리를 일깨우기 위한 추가 장치>

 

자 이렇게 하늘에 소망을 두라고, 그 구원과 회복과 영광의 소망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삶의 리듬 속에서 일곱 번째 날을 두시고 안식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세밀하고 자상하신 분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에 대한 이 소망을, 할 수만 있으면 항상 기억하게 하시려고 갖은 상징과 예표를 다 동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옷에다 하늘 색으로 특별한 표시를 하라는 거예요) 39)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민수기15:38-40)"

 

어떻게든 하늘에 속한 삶의 방식, 거룩과 경건을 추구하도록 만들고 싶으셔서 대대로 의복에다가 파란색 끈으로 표시를 만들어서,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안식에 대한 규례에도 세밀한 장치를 더하십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매 칠일마다의 안식일에다가 일곱 번째 해가 돌아올 때에는 6년 동안 농사를 짓던 땅을 한 해 동안 묵혀서 안식년을 실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진행되고 난 그 다음해 곧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해서, 모든 노예들을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담보로 잡았던 땅은 아무런 조건 없이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너희는 이 땅에 천년만년 자리 깔고 눌러앉을 자들이 아니고 하늘의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백성들에게 이렇게 안식의 규례를 정해주시고, 간곡한 당부로 그 원리를 각인시키셨는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상치 않은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36)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민수기15:32-36)"

 

불신앙적인 악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대놓고 멸시하고 능욕한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일벌백계로 교훈을 삼으셨습니다. 이런 일이 구약에서도 있었고, 신약에도 교회가 시작되던 초기에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과 위선으로 성령을 속이다가 베드로 앞에서 죽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민수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안식일을 통해 고백되어야 할 신앙의 원리가 목숨이 걸릴 만큼 중요하고 귀한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두려움으로 마음에 새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는 이미 수도 없이 띵겨(떼어) 먹었는데 안 죽고 살아 있네요...'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 주시는 겁니다. 복 받은 줄 아시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줄도 아셔야 합니다.

 

매 맞는 얘기 징계 받는 얘기를 말씀드리면 피차간에 썩 유쾌하진 않지만 2007년 7월 29일 주일에 북한산과 수락산에서 벼락이 쳐서 등산객 다섯 명이 죽고 10여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때도 제가 서부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러분 모두 소창호 집사님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소집사님은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으시는 분이었는데 언제나 차에 오르시면 그 시간까지 보고 계셨던 뉴스채널의 헤드라인 뉴스를 논평하십니다. 목사님! 아 이명박 대통령이~ 이러고 하루를 시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주일 오후에 북한산 용혈봉에서 등산객들이 벼락에 맞아 사망했다는 뉴스 나가고 월요일 새벽이 됐는데 소집사님께서 어김없이 한 말씀 하셨습니다. “아 글게~ 왜 주일날 예배들 안나오고 산에들 겨올라가서 죽고 자빠진 것이여~ 참 내~” 저도 죽거나 부상당한 그 10여명 중에 주일 예배를 빼먹고 산에 올라갔던 날라리 신자가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2009년도 2월 9일 주일에도 경남 창녕군에 있는 화왕산 억새 태우기 축제에서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역풍이 불어가지고 관람객들에게 불이 붙었습니다. 4명이 죽고 71명이 부상을 당한 참극이었는데요. 저녁 뉴스에서 그 안타까운 장면을 그냥 생중계를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몸에 불이 붙어가지고 이리저리 비척대는 참담한 모습을 말입니다. 그 때도 그걸 보면 문득 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기도 주일 빼먹고 놀러간 안타까운 백성이 섞여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마도 비하인드 스토리를 조사해 보면 틀림없이 한 둘은 그런 사람들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실패한 역사와 징계>

 

어쨌든 이렇게 간곡하게 원리를 세워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안식일과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안식의 원리를 우습게 여길 때마다 신명기의 이 장면처럼 불을 내리고 번개를 내려 징계를 하셨다면 군기가 바짝 들어서 잘 지켰을 텐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하시기보다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사랑을 가지고 순종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염없이 기다려 주십니다.

 

안식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간곡하게 권면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이사야58:13-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도 종내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끝내 멸망을 자초하던 마지막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안식의 원리를 멸시하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이스라엘 땅을 전쟁으로 황폐하게 만드시고 그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어가게 만드셔서 안식년을 강제집행하십니다. (역대하36:17-21)에는 그 일이 이렇게 평가되어 있습니다.

 

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18)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기명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9)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20)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역대하36:17-21)

 

<본질을 놓친 껍데기 율법주의>

 

이렇게 혼 줄이 나고 70년 만에 다시 돌아 왔을 때는 이 사람들이 군기가 바짝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세대부터는 안식일을 얼마나 철저히 지켰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람들이 안식의 원리가 뭔지를 깨닫고 거룩한 완성을 향한 경건한 추구로써의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라 그날을 지키는 그 자체를 종교적인 계율로 강화해서 무식하게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전쟁을 하는 중에도 안식일이 되면 모든 무기를 내려놓고 저항을 포기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하시딤 운동이라고 그러는데 한 때 극심하게 유대인들을 핍박했던 안티오쿠스 4세는 이 사람들의 약점을 잘 알고 안식일만을 골라서 공격하곤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습격을 당해도 도망도 저항도 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한 자리에서 1천 여명이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한 사례까지 있다고 그럽니다. 이 사람들의 후예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입니다. 안식일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어기면 큰일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말도 안 되는 세부적인 규례들을 만들어 지키려 했습니다.

 

안식일에 물건을 떨어뜨렸을 때 집어들면 죄냐 아니냐 얼마의 거리를 걸어가면 노동을 한 것이 되어 죄를 입게 되느냐 뭐 이런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배가고파서 이삭을 비벼 입에 털어 넣었더니 안식일에 추수를 했다고 쌍심지를 켜대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위선적인 태도를 미워하셔서 짐짓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셔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요, 하늘에 속한 영광과 자유를 기억하라는 날이지 계명을 어길까봐 쩔쩔매는 날이 아니다. 이게 예수님의 입장이셨습니다.

 

원리와 내용을 정확하게 알면 그 가운데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너희는 돼지처럼 더럽고 미욱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이 조난을 당했는데 그 배가 공교롭게도 돼지를 실은 배여서 돼지들이 함께 떠내려 와 무인도에 도착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돼지를 먹고 목숨을 건지는 게 옳은 일일까요?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 굶어죽는 게 하나님 뜻일까요? 율법을 지키겠다고 굶어죽는 태도를 우리는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신 원래의 뜻을 아는 자들은 그런 경우에는 돼지고기를 감사히 먹고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이런 사람은 진리를 아는 자로서의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딱 이런 사례가 나와 있습니다. 다윗이 제사장만 먹는 거룩한 떡을 먹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법에 매인 비인격적인 신이 아니고 긍휼과 이해를 가지신 인격적이신 분이심을 제사장과 다윗이 알고 법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제사장의 떡을 일반 평민들인 다윗 일행이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비난하셨습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마태복음12:1-7)”

 

하나님을 무지막지한 원칙주의자로 알아서 율법에 얽매이는 인간과,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로 알아서 신뢰 깊은 융통성을 발휘한 태도 중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은 다윗이 보여준 태도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원리와 내용을 모르면 아주 우스운 위선을 떨게 됩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교회 나가서 신앙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처음 열심이 다 그렇듯이 신앙생활을 무지 열심히 했습니다. 난생처음 교회에 나갔는데 그 교회 사모님이 40일 기도회를 인도하고 계셨어요. 매일 저녁 나가서 맨 앞자리에서 꿀떡같이 말씀을 들으니까 저를 무척이나 예뻐라 하셨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고래도 춤을 춘다고 신이 나서 별별 일을 다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사택에 연탄재를 버려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사모님이 불러서 심부름을 시켜주시는 게 제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께서 주일 오후가 되면 꼭 시키시는 일이 빵집에 가서 식빵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이었습니다. 돈은 내지 말고 외상으로 장부 처리를 하고 오라는 겁니다. 주일에 돈을 쓰면 안 된다는 입장이셨습니다.

 

그 교회가 성북구 장위동에 있었는데 그 때 당시에 사당동에 살던 대학생 형 하나가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느라고 아침 일찍 교회로 와서 저녁예배까지 있곤 했습니다. 점심은 교회에서 주지만 저녁을 따로 주지를 않으니까 저녁으로는 자장면을 사먹곤 했어요. 그러다 사모님한테 딱 걸렸습니다. 거룩히 지켜야할 주일날 뭘 사먹느냐고 노발대발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모님이 매 주일 저녁에 시킨 일을 알고 있잖아요. 신앙생활에 철이 들고 나서 그 기억을 하면 참 안쓰러운 생각에 손발이 오그라들곤 했습니다.

 

<영광과 설레이는 기쁨으로>

 

우리는 영광과 설레이는 기쁨으로 안식의 원리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얼 해서는 안 되는 날로 이 날을 기억하지 마시고 하늘에 속한 일들을 행하는 날들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풍성하게 일구고, 어려움을 당한 지체들을 돌아보고, 저녁에는 가족들이 둘러 앉아 예배와 즐거운 식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주일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선순위를 지켜서 예배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절대로 다른 것과 바꿔먹지 않는 복되고 자랑스러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토요일에 지키던 안식일이 어찌해서 안식 후 첫날인 주일 예배로 바뀌게 되었는지, 또 안식일 개념은 율법과 함께 다 지나간 것은 아닌지, 이런 이야기는 율법과 복음의 자유라는 주제로 다른 기회가 있으면 그 때 들으시기 바라고, 유대인들이 지키던 안식일은 자체는 폐기되었지만 태초부터 세워진 안식의 원리와 거룩한 영광으로 초대하는 이 신앙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만 기억하셔서 주일을 복되고 소중히 여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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