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1장-3장

  • 하나님말씀 >
  • 창세기1장-3장
◈ 창2:1-3 --- 안식일의 원리
진주호 2015-01-26 추천 0 댓글 0 조회 699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의 창조를 다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쉬운 번역 성경은 '일곱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습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식하셨다는 말은 쉬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일곱째 날을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기록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이 여기에 왜 기록된 것인지를 밝혀서 중요한 신앙의 원리로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시간과 순서와 절차를 주신 이유>

 

안식일을 거론하기 전에 우선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모든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여섯 단계에 걸쳐서 순차적인 시간을 두고 하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주님의 능력이라면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창조하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엿새 동안 매달려서 완성하시는 것과 한 순간에 ‘뿅’ 하고 완성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능력 있게 보입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능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면서 엿새씩이나 걸려서 어떤 순서를 가지고 차곡차곡 일을 진행시킨 걸까요? 하나님 자신 때문입니까? 우리 인간들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 인간들 때문입니다. 왜요?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시간과 순서와 질서를 요구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부터 시간의 경과를 두고 모든 천지와 만물이 순차적으로 나타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들은 그 질서에 복종함으로써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란 사실을 고백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농부가 씨를 뿌리고 그 다음날 가서 추수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물을 주고 볕을 쏘여주면서 그 다음에는요? '기다려야지요' 급하다고 심어 놓은 씨앗을 매일 뒤적거리며 꺼냈다 심었다 그러면 죽습니다. 기다리면서 우리는 우리가 전능한 능력으로 '한 번에 다 자라라'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제한된 연약함과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모든 것을 받아서 누려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편에서는 전혀 순서나 기다림 이런 거 필요 없이 한 순간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실 수 있으시면서도 첫째날, 둘째날, 세째날... 하시면서 우리에게 시간과 순서와 기다림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셨다고?>

 

그러고 난 후 일곱째 날이 되자 하나님이 쉬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을 하시느라고 피곤하셔서 피로회복을 위해 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실 일을 다 하셔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완성의 표시로 쉬신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완성을 선언하고 축하하고 누리는 날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날이 어떤 의미에서는 완성이었지만 과연 완전하게 영원히 완성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창세기1:28)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들은 아직 완결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때 여러분은 어디 계셨습니까? 아직 아담 안에 들어 있었을 뿐입니다. 진정한 완성이 되려면 역사가 흘러야 하고 하나님께서 아담 안에 창조해 두신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다 나타나고 그 최후의 한 사람이 자기의 일평생을 통해 다 완성되고 난 후에 영원한 세상이 와야 비로소 진정한 완성 진정한 안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2장에서 거론되는 이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 아니고 영원한 안식이 있다는 것을 우리 인간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한 계시의 장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3절)에 있는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시간이라는 신비>

 

잠시 주제를 바꿔서, 시간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시간이라는 실체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시간을 정의하기를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미래로 움직이는 비(非)공간적인 연속체(連續體). 수수께끼 같은 시간의 개념은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행은 이해하기 힘들다. 예로부터 시간은 관측할 수 있는 세계가 속해 있는 3차원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했으나, 오늘날의 현대 물리학 이론은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 연속체라고 하는 단일한 것으로 통합시켰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백번을 읽어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시간이란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이다’ 하고 써 있구요. 물리학에서는 ‘지구의 자전 주기를 재서 얻은 단위. 이론적으로 고전 물리학에서는 공간에서 독립한 변수 곧 절대 시간으로 다루어졌으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는 양자가 물리적 사건을 매개로 하여 사차원의 시공 세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역시 도통 뭔 얘긴지 모를 소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색(色)과 심(心)이 합한 경계. 즉 물질과 마음이 만나는 경계’ 라고 가르치고 있구요. 심리학에서는 ‘전후(前後), 동시(同時), 계속의 장단(長短)에 관한 우리의 의식(意識)’ 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에서는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로 무한히 연속되는 것. 곧 사물의 현상이나 운동, 발전의 계기성과 지속성을 규정하는 객관적인 존재 형식을 말한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 누가 이것을 쉽고 짧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나에게 이것을 물어보지 않을 때는, 나는 시간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누군가에서 시간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나는 설명을 해줄 수가 없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간이란 인류의 수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부단히 연구해 왔지만 아직 그 실체에 대해서 명확한 파악이 어려운 신비로운 내용입니다. 흔히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고 구분하고 그중에서 현재가 제일 확실하게 경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물리학자들은 현재라는 시간은 아예 없다고 주장합니다. 시간은 미래에서 곧장 과거로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과거라는 시간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흘러가버린 것이고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합니다. 그럼 미래는 어떻습니까?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단 1분의 미래라도 우리는 도무지 손에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있나요? 여러분이 '있습니다'하고 대답하는 순간 순식간에 과거가 되어버렸습니다. 현재라는 건 매순간의 미세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서 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시간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겁니까? 헛갈리고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도무지 증명할 수 없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간단한 실험으로 시간은 절대로 한 쪽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걸 단박에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유리컵이 여기 있습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컵을 바닥에 떨어뜨려 깨버립니다. 그러면 유리컵이 깨지기 전의 시간과 깨진 후의 시간의 차이를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는 일방적이어서 깨진 유리컵을 깨지기 전으로 절대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이로 보건데 시간은 미래에서 순간적인 현재를 거쳐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여간 시간이란 아직 현대의 과학으로 다 규명하지 못한 신비의 영역입니다.

 

<일곱째 날의 메시지>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서 그렇게 순차적으로 펼쳐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이 하나님의 앞에서 다 펼쳐져서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그곳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곳입니다. 그곳은 아담이 처음 태어나 맞이하게 되었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이롭고 완전한 곳이요 무궁무진한 신비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 세계라고 표현하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아담과 인류는 창조된 것으로 끝난 게 아니고 영원한 완성을 향해서 역사를 통과하여 하나님 안으로 무한히 자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바로 그 사실을 아담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귀하고 소중한 날이었습니다. "아담아 너는 여기서 눈에 보이는 우주와 만물을 가지고 놀면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머물러 앉을 존재가 아니고 네가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자라나서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는 신적 존재로 완성되어가야 한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안식일이 아담에게 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다가 일곱 번째 되는 날에는 땅에서의 모든 일들을 쉬면서 나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위해 거룩함과 순전함과 순종과 사랑을 드려야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묵상하고 추구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만약 선악과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여 죄 없는 상태에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었더라면 인류는 아마도 매 7일 마다의 안식일을 통해서 완전하고 거룩한 하늘의 안식을 배우고 그 나라의 존재방식을 훈련하여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상 없이 에녹처럼 엘리야처럼 그렇게 영원한 나라로 직접 초대받아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기초 개념은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 날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 날은 처음부터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어디로 가야할 존재인지를 표현해 주는 소망의 지침서였고,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축복의 날이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달력이 7일 주기인 이유는>

 

여러분 세상에 달력이 왜 7일 주기로 되었을까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게 명확한 근거가 있지를 않고 다들 추측만 난무할 뿐입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추측해 본 내용 중에서 설득력 있어 보이는 주장을 하나 찾아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인류가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를 통해서 달력을 만들어 사용했고 거기서 7일간의 주기가 생겼다고 주장했습니다. 보름 상현 하현 그믐 등 달의 위상이 변화하는 간격이 대략 7일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7을 신성한 숫자로 생각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오래 전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인류는 태양을 중심으로 7개의 행성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7일 주기를 하나님 편에서 친히 제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의도 아래에서 6일이라는 시간 아래 생활을 이루고, 7일 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갈 방향이 어딘가를 깨우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죄가 없는 상태에서 역사를 이루게 되었다면 우리는 늘 행복한 안식일을 맛보며 보다 더 영광스럽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죄로 부패한 세상에서 안식의 원리로 사는 것>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존재로서의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고, 죄가 없는 거룩한 상태에서 인류의 역사를 진행시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타락이라는 조건 속에서 죄와 불법의 공격을 받으며 죽음을 앞에 두고 수고와 슬픔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서 회복의 소망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인류가 가진 신앙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원래 마음껏 누리도록 되어 있던 에덴의 풍성함은 사라졌고, 기쁨과 감사 속에서 자신들이 장차 영원히 완성되어갈 존재라는 걸 깨닫게 해주던 기쁨과 축제의 일곱 째 날의 안식도 사라지고 이 세상은 안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수고와 슬픔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로 인간을 포기해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셔서 유혹하던 사탄의 머리를 밟으시고 인류를 죄에서 건져내 주시겠다는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안식일을 지켰던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회복되고 마침내 들어가게 될 영원한 안식의 약속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땅의 번영보다는 구원의 안식을 더욱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 장이 시작되기 직전인 히브리서 10장 32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히브리서10:32-35)"

 

바로 이것이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간 삶의 태도였습니다. 믿음의 첫 조상인 아벨이 그의 형 가인에게 목숨을 잃었지만 성경은 그를 가리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러지 않고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복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 땅에서 형통하고 번영하는 삶은 성경에서는 오히려 가인의 후손들이 추구하고 받아 누렸던 삶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도 천수를 다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부자가 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이 땅에서 오래오래 장수하는 것을 성경은 꼭 축복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조심스럽게 누리지 않으면 영혼의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심판받을 죄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셔서 제 마음대로 살게 허용해 두신다고 하면서 그 자체가 저주라고 선언합니다. 부자가 되고 아무런 간섭도 안 받고 편안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서,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래서 영원한 안식과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사는 것, 그게 바로 저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5:8-12)에도 이렇게 저주 받은 부유한 자들이 등장합니다.

 

"8)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11)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5:8-12)"

 

예수님께서는 비유로써 이런 자의 비극을 경고하셨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놓고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럴 때,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는 겁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헛된 욕망을 벗어버리도록 안식일이라는 등불이 인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살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안식을 향해 자라가야 할 존재라는 가르침이 안식일에 새겨져 있었던 겁니다.

 

<안식일을 통한 믿음의 고백>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우리 편에서 나타내야할 특별한 고백이 요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영원하고 영광스럽고 완전한 안식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이런 고백이 들어 있는 겁니다. 이 고백은 말로 하는 게 아니고 하던 일들을 다 내려놓고 7일마다 하루씩 쉬는 것으로 표현하라는 겁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계명으로 주신 안식일 명령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안식하게 할지니라"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주인입니다. 7일마다 한 번씩 안식일을 지켜서 종들과 모든 짐승들을 쉬게 하는 게 이익입니까? 휴일 없이 돌아가면서 3교대로 줄창 일을 시키는 게 이익입니까? 돈을 벌고 번영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쉬지 않고 잡아 돌리는 게 분명히 이익입니다. 좀 더 우리의 현실과 맞물린 얘기를 해보실까요? 여러분이 식당을 차렸습니다. 공휴일인 주일에는 다른 날의 3배의 매출이 일어납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주일은 쉽니다' 푯말을 써 붙이고 문을 닫으면 손해가 나나요 안 나나요?

 

바로 그 말입니다. 그렇게 손해를 감수하고 쉴 때, 옆집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빙신들 계산도 못하냐 다른 날 곱절 장사가 되는 날에 교회를 간다고 문을 닫어' 그렇게 조롱을 들을 때 담대하게 선언하라는 겁니다. 그래 맞다 엄청난 손해를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기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다. 내가 비록 땅의 것은 손해를 보지만 주일에 교회에 나가 누리고 맛보는 하늘의 축복은 내 재산을 다 팔아서도 살 수 없는 값지고 소중한 것이다. 내가 당신들 보다 훨씬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고백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바로 안식일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걸 부흥사들이 다 망쳐 놓았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주일에 문을 닫으면 하나님께서 그걸 10배로 갚아 주신다고... 록펠러도 그랬고, 모나미 볼펜 사장님도 그랬고, 아무개 교회 김 집사도 그래서 지금 100평짜리 아파트에서 산다고... 이렇게 되면 말짱 꽝인 겁니다. 안식일이란 땅에서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영원한 나라를 기다린다는 신앙의 고백인 건데 그걸 이 땅에서 다 보상 받게 된다고, 그렇게 약을 팔아서 엉뚱한 계산속으로 감당하게 만드는 건 기독교의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악한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보상을 바라는 알량한 계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감추인 그 영광스러운 기업을 바라보기 때문에 담대하고 기쁜 마음으로 손해를 감수하는 안식일의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더 나은 길이요 영원히 사는 길이요 영광의 길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럽고 담대한 믿음의 결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 창2:1-3 --- 안식일의 실천 진주호 2015.01.27 0 840
다음글 ◈ 창1:26-28 ---- 인간이란 존재의 사용설명서 진주호 2015.01.26 2 802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증가로 78(연희동)

Copyright © 서부중앙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0
  • Total68,657
  • rss